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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임 Mar 31. 2021

낮의 재질

해가 어스름 지는 저녁. 노을이 가신 자리에 짙푸른 저녁이 막 내려앉기 시작하는 무렵, 이미 어둑해진 지 오래인 방 안에 앉아 불도 켜지 않고 고집을 피운다.

서운해서. 이 무렵에 불을 켜는 일은 가는 낮을 서둘러 보내고 오는 밤을 재촉하는 행위다. 어쩐지 불을 켜는 순간 해는 더 빨리 진다. 나는 낮의 기운을 조금 더 붙들고 싶었다. 책 읽기 방해가 될 만큼 어둑해질 무렵에서야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일어나 스위치를 누른다.

불이 켜지고 창문 너머로 더 선명히 어두워진 바깥의 색.

달칵 소리와 함께 안과 밖이  하고 갈라진다.

그렇게 밤의 색이 짙어지면 방안을 가득 밝힌 형광등 아래 왠지 생경한 몸뚱이가  있곤 했다. 나는 종종  생경함 앞에서 무력해졌다.


잠시 어쩔 줄을 모르다 침대 끝에 황망히 걸터앉는 일.

어색한 손길로 읽던 책을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고  자국 같은 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생경함이 싫어서 다시 꺼보기도 부지기수. 어둑해진 방안을 금세  채웠던 인공 빛을 거두고 아주 조금 남아있던 빛에 눈이 익숙해지는 데는 시간이 약간 걸린다.

이렇게 사그라드는 빛에 집착할 만큼 나는 저무는 해가 서운했다. 밝은 낮이 주는, 별일 없는데도 괜히 희망찬 뭔가가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기운이 좋아서.

습해서 숨이 턱턱 막히는데도 여름의 저녁이 좋은 이유도 그래서. 일곱 시가  됐는데도 노을  하나 없이 밝은 . 그럴때면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면서 괜히 혼자 뿌듯해 설레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겨울 저녁은 야속하다.

정시에 퇴근해도 이미 캄캄해진 바깥을 보면 괜히 손해  기분이 든다. 계절에 찬기가 가실수록 퇴근길 달리는 버스 안에서 오늘은 어느 정거장에 닿을  해가 지는지 어림하곤 했다.


여름에 가까울수록 점점 길어지는 밝음이 반가운 오늘, 마침 미세먼지 좋음인 오늘, 달리는 버스 안에서 열어 놓은 창문 틈새로 연신 휘날리는 머리칼이 얼굴을 간질이게 내버려 두며 나는 생각했다.

낮이 길면 뭐 하려고. 딱히 하루를 더 길게 보내는 것도 아닌데. 이제는 고칠 시도 조차 하지 않는 꼰 다리를 다시 반대로 꼬았다. 아무리 내쉬어도 해갈되지 않는 긴 한숨을 봄바람에 몰래 섞어 흘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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