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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임 Mar 26. 2021

S에게

S에게

 침묵. 너와의 대화를 떠올리면 나는 가장 먼저 침묵이라는 단어가 생각나. 아니다, 왠지 침묵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이 탐탁지 않으니 다른 표현을 생각해볼까. 그렇다면 ‘공백’이 어떨까. 그래 너와의 대화를 떠올리면 나는 공백이 제일 먼저 떠올라. 대화와 대화 사이의 쉼표. 어떤 관계는 핑퐁으로 오가던 대화가 멈추는 순간 참을 수 없는 어색함이 밀려오기도 하고, 그 공백을 메우려 용을 쓰다 굳이 할 필요 없던 얘기를 꺼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어색해지기도 해. 어쩌면 대부분 사람은 대화가 멈추는 순간을 견디지 못하는 것 같아. 끊김이 단절은 아닌데 말이야.


 나는 이 공백을 이야기와 이야기를 잇는 숨 고르기 같은 거라고 생각해. 쏟아져 나오는 말들을 그대로 두면 이야기는 야생마처럼 사방으로 튀어나오기도 하잖아. 자유롭고 무궁무진하지만 그렇게 떠나간 말은 다시 돌아오지 못해. 나는 언젠가부터 이 숨 고르기를 의식하기 시작했어. 의식한다고 해서 모든 대화를 경건하게 검열하는 건 아니지만(그건 참 피곤한 일이기도 하겠다) 생각이 필터를 거쳐 입으로 나오기까지의 찰나, 그 짧은 로딩을 건너뛰지는 않으려고 해. (그런데 우습지 이게 잘 안 되는 관계가 있어. 이를테면 가족) 가끔 그 로딩을 건너뛰고 야생마를 풀어 놓을 때면 하루 이틀 뒤 뜬금없이 그 기억이 떠올라 시시포스의 형벌 같은 시간을 보낸 적도 있어. 웃기지. 형벌이라고 적어 놓고 보니 꽤 과중한 것처럼 들리지만 왜 있잖아, 나도 모르게 반복해서 튀어나오는 기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허공에 빗금을 치면서 진저리치는 일.


 침묵이 편한 사이. 나는 너와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하고 싶어. 얼굴 보고 얘기하려고 만난 두 사람이(대체로 목적 없이 만난 친구와의 만남이 그렇듯) 말 없이 앉아있는 풍경을 카메라에 담으면 어떻게 보일까. 상상해보니 조금 웃음이 난다. 우리는 종종 이야기 도중에 말 없이 허공을 바라볼 때가 있지. 쓸데없는 얘기에 킬킬거리기도 하고, 친구가 겪었다는 일을 들으며 함께 분통을 터트리기도 하는 보통의 오랜 친구 사이. 그사이에 또 쉼이 있고, 그 쉼 사이에서 쉽게 터놓을 수 없었던 속 얘기를 나누기도 해. 그 자연스런 오고감. 나는 그 속도가, 여백이, 차분함이 좋아. 우르르 쏟아지는 말의 홍수에서 헤엄치다 집으로 돌아가는 날엔 ‘낭비’ 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 불필요한 에너지의 소진. 그럴 때면 너와의 평온한 시간이 생각나곤 해. 우리 이렇게 앞으로도 종종, 허공을 바라보자. 손에 쥔 맥주캔이 미지근해지도록 공들인 여백. 그 사이에서 우리 진짜를 얘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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