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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임 Mar 30. 2021

엄마의 아기

도산공원에 위치한 카페에 앉아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평일 오후 세 시. 이미 만석인 테이블을 슥 훑다 대체 이 사람들은 뭐 하는 사람들인가 기막혀 한다. 하긴 나도 여기 앉아 있지.

지독히 습한 2016년의 여름을 다소 점잖케 버티게 해준 아이스 아메리카노. 입맛에 꼭 맞는 이 카페의 시원한 커피가 너무나 간절했다. 그런데 사람 생각 다 똑같지, 이 집 커피가 특별히 내 입맛에만 맞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어렵게 쟁취한 커피를 받아 들고 얼음 속에 파묻힌 빨대를 휘적이는데 바짝 붙어 앉은 옆 테이블의 대화가 너무 잘 들린다.

평범한 중년 아주머니  . 여름옷을  이야기, 각자의 해외여행 계획을 나누고 있었다. 여유 있는 그녀들의 취미생활에 딴지를 걸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지만 나는 그들을 흐릿하게 바라보며 엄마를,  시간에 애를 보고 있을 엄마를 떠올렸다.


나의 엄마는 베이비시터로 일한다. 나는 감히 엄두도 못 낼 '사람 키우기'를 이미 두 차례나 치렀음에도(아직 현재진행형에 가깝지만) 또 다른 아기를 사람으로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그 어렵다는 남의 새끼를.

그래도 아이가 잘 따르고 예쁜 짓을 하는 데다 그 집 부모도 깍듯이 엄마의 노고를 감사해하니 다행이다.

오랜 시간 아이를 키우면서 엄마에게는 자신만의 훈육 철학 같은 것이 생겼다. ‘우리 때는 다 이렇게 키웠어’가 아닌 신구의 조합이랄까. 엄마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신식 육아와 구식 육아의 장점만을 고루 섞어낸, 그러니까 육아의 고수쯤 되는 것이다.


모든 육아의 시작은 사랑이다. 나는 엄마가 결혼해서 뭣 모르고 낳은 첫딸이다. 엄마 세대 역시 결혼을 하면 무조건(빠른시일 안에) 애를 낳는 것이 어떤 도리였다.

그렇게 엄마는 처음 겪는 육아에 혼비백산하여 애기 예쁜 줄을 모르고 나를 키우셨단다. 내가 이십 대 중반을 넘어서던 어느 무렵, 엄마는 넋두리처럼 이 얘길 풀어놓았다. 그래서일까 엄마 눈엔 세상 모든 아기가 천사처럼 예쁘다 했다.

‘세상에 미운 애기는 없어’.

그럴 리가. 내 눈엔 미운 애기도 보이던데.

정답을 말하는 눈빛으로 아기를 사랑하는 단호함에서 엄마의 직업이 숭고한 일임을 다시 한 번 느낀다.

직업으로서 아이를 키우는 일은 지독히 극한 업종임에 틀림없다.

말귀를 알아들어도 도무지 뜻대로 따라주질 않는다.

아기니까.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지만 나로선 유모차에 누워 무슨 이유에선지 빽빽 울고있는, 엄마가 밥을 떠 먹여 주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장난감을 바닥에 떨어트리는 아기들을 볼 때마다 피로함에 고개를 젓는다.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전쟁 같은 육아를 내 새끼도 아닌 남의 새끼를 데리고 치르면서도 엄마는 아이가 예쁜 짓만 한다며 웃는다. 찜통 같은 더위에 우연히 길에서 만난 엄마는 아이를 업고 비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코알라처럼 달라붙은 아기는 엄마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고 싶어 하지 않아 했다. 아기는 엄마를 또 다른 엄마로 여겼고, 떼를 쓰다가도 엄마의 훈육 앞에선 옳고 그름을 알아갔다.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에게 흘러나오는 에너지가 있다. 성격이 형성되는 시기에 충분한 사랑과 필요한 훈육을 받고 자란 아이에게서 느껴지는 건강한 기운.

청소년기를 지나고 성인이 될 때까지 아이를 흔들림 없이 지탱해줄 힘이다. 어느덧 뜀박질까지 하게 된 엄마의 아기에게서 나는 그 힘을 보았다.


이만하면 본인의 직업에 자부를 가져도 좋으련만 엄마는 이 사실을 가까운 친구들에게 비밀로 부친다.

나는 아이를 당신의 온 체력을 동원해 사랑으로 키우는 엄마의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입을 다묾으로써 그녀의 자존심을 지켜 준다.

하고, 초점 없는 눈으로 이런저런 생각의 부피를 키워나가는 새 얼음이 반쯤 녹았다. 빨대를 입에 물고 긴 한 모금을 마신다.

오늘따라 이 집 커피가 입에 잘 맞는다. 엄마도 커피 참 좋아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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