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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E Aug 16. 2021

당신은 조직의 호구인가 빌런인가?

*백수종료일지 이후로 이런 글을 올리게 되어 심히 유감입니다만..^^;


최근 다시 조직 생활을 하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진정한 호구는 자신은 단언코! 절대! 네버! 호구가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이었다는 것. 그러니까, 다시 말해 바로 나 같은 사람! 몇 달 전, 지인이 직장 생활 호구에 대한 책을 준비 중이라면서 호구 잘 잡히는 이들의 공통점을 누구보다 잘 알지 아냐며 추후 도움을 예약했다. 내가 호구라서가 아니라, 나는 누가 봐도 호구인 사람들(정작 자신만 모르는)이 회사 생활의 고충을 풀어낼 때마다 '당신은 이미 호구 잡혔습니다.'라고 대쪽같이 말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란다. 흔쾌히 승낙하는 순간에도 내심 나는 호구가 절대, 네버, 아니라는 교만을 품고 있었으리라. 그러다 회사 일로 스트레스가 고조돼가던 어느 날, 불현듯 주변을 쓰윽 둘러보는데, 어마낫! 주변이 온통 호구보다 멀쩡한 사람을 호구로 만드는 빌런들만 가득하다는 사실에 섬뜩했다.

세상만사 등가 법칙처럼 돈을 번 놈이 있으면 잃은 놈이 있고, 승자가 있으면 패자가 있는 법.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에 의거해, 빌런이 수두룩하다면 빌런의 먹잇감이 되는 호구도 그만큼 많다는 이야기일 터. 자자, 그럼 이 공간의 호구는 누구일까? 상선의 어떤 질타에도 둔감력, 탄력성이 좋아 끄떡없어 보이는 A? 윗분들 눈치 살피기 급급한(정작 실무는 물 흐르듯 아래로 떠넘기지만) B? 어리숙해 보이지만 늘 걱정 없이 칼퇴하는 C? 장남과 막내 사이 낀 서글픈 둘째처럼 이도 저도 아닌 D? 에이, 설마 나..?


남들보다 조금 빠르게 취업에 성공한 케이스라, 일찍이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는 지금껏 최소한 누군가에게 빌런이었던 적 없고, 호구 잡힐 만큼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요령 피우며 사회생활하는 법을 익히지 못한 게 문제였을까? 가만 생각해보니 늘 조직에서 가장 먼저 지쳐 쓰러지고 결국 제 발로 뛰쳐나가는 건 바로 나였다. 되려 조직에 가장 오래 남는 사람은 잘 참거나 참을 게 없는(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직의 극과 극은 상생할 수 있지만, 어느 극에도 끼지 못하고 적도에 머무는 나 같은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끝끝내 규정짓지 못하고 휘청휘청 표류하다 튕겨 나오기 십상이다. 억울해할 건 없다. 나는 어설픈 평화주의자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니까.


회사 생활의 8할은 관계에서 비롯되는 법. 그에 따른 포지셔닝은 무척 중요하다. 크고 작은 에피소드가 이어지는 현실 오피스 드라마 안에서 다들 어떤 캐릭터를 맡고 계시는지?

요즘 신종 빌런들은 꽤 영리해서, 전처럼 대놓고 악역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되려 자신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해 호구와 동질감을 형성한다. 내 역할이 호구인지 빌런인 지. 저 사람도 나와 같은 처지인 지 아니면 나를 가지고 노는 빌런인 지 도무지 알 수 없도록 교묘한 수법으로 호구를 곁에 두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요즘 호구는 무작정 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마치 팔다리에 묶인 느슨한 줄을 자각하지 못하고, 저 혼자 춤을 추고 있다고 믿는 헛똑똑이 목각 인형이 더 많다는 얘기. 그러니까 나는 절대, 네버, 호구가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의 대단한 착각이 신종 빌런의 무기가 된 셈이다.


회사에서 아무리 직급을 없애고, 나이의 서열을 무너뜨려도 조직 생활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기싸움이 있기 마련이다. 물론 누구나 각자의 입장이 다르고, 때때로 누군가는 뜻하지 않게 빌런을 자처하게 될 수도 있다. 그에 맞는 세트 구성처럼 호구도 정해져야 하는 것이고. 모두가 빌런인 회사도 괴롭지만, 모두가 호구인 회사도 제대로 굴러갈 수 없다(그럼 외부 세력의 빌런에게 일찍이 잡혀 먹였겠지). 그럼 이제, 결정해야 한다. 빌런이 될 것인가. 호구를 잡힐 것인가. 아니면 적도에서 뜨뜻미지근하게 살다가 유유히 튕겨져 나올 것인가.


강한 자에겐 강하게, 약한 자에겐 약하게! 권력에 비겁해지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으로 회사 생활을 하면 얻는 건 별로 없다. 나는 절대 호구가 아니라는 믿음이 와장창 깨지던 그날, 언제나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상황을 만드는 빌런들이 눈에 또렷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들의 희생양이 되어 회사를 떠나야 했던 사람들의 얼굴도 스쳐갔다. 빌런들의 논리라면, 그들은 멘탈이 약하고 무능력한 사람이기에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었던 거지만, 반대 상황에서 보면 그들은 빌런들의 세계에서 자신은 평생 호구가 되어줘야 한다는 사실을 직감했으리라.


이건 선과 악의 개념이 아니다. 어떤 성질에 가깝다. 차갑고 뜨거운 것이 옳고 그름이 아닌 것처럼. 그러니 이 세상 호구들이여, 자책은 그만. 더불어 이 세상 빌런들이여, 자만은 그만. 당신들이 쉽게 발을 뻗는 순간, 누군가는 자신의 비좁은 자리를 내어주어야 사실을 부디 자각하길 바란다. 그리고 나처럼 뒤늦게 자각한 호구들에겐 진심을 담은 응원과 위로를 보낸다(네, 나님에게도요) 


P.S 그럼 답은 없냐고요? 이렇게 된 이상 목각 인형처럼 사는 어설픈 호구가 되느니 차라리 외로운 빌런이 되는 건 어떨까요? 짝을 잃은 빌런?  뭔가 스스로는 악당이라 자부하는데, 정작 당해주는 사람 하나 없는 그런 빌런, 좀 귀엽지 않나요? (쓰다보니 아무말대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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