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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E Nov 17. 2019

참을 수 없는 여행의 허무함

당신은 여행자인가요? 도망자인가요?

 최근 더 이상 여행을 가지 않고, 여행책을 읽는 것으로 여행을 대신한다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그들의  생각을 모두 대변할 순 없지만, 짐작하는 바로는 이렇다. 여행은 사서 하는 고생이다(그건 나도 동감). 여행에는 시간과 돈, 체력 그리고 정신적 스트레스가 언제나 뒤따른다. 지난 과거가 미화되는 것처럼 여행도 기억의 조작으로 남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다면 그 수고스러움(체력+정신적 스트레스)을 건너뛰고 상상 속에 머무는 여행이 오히려 나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남이 겪은 이야기를 낄낄거리며 관망하는 것이 여행을 잘하는 방법 중 하나라는 얘기다. 세상 모든 일을 직접 겪어야만 아는 건 아니니까, 여행책으로 여행의 욕구를 해갈하는 그들이 어쩌면 한 차원 나아간 고도의 여행자일지도. 과연 그럴까?


 지난 5월에 산에 다녀온 후 아직 글로 남기진 못했지만, 정리되지 않은 여행기가 마음속에 짐처럼 남아 있다. 그동안 여권에는 낯선 도장이 4개나 더 추가됐다. 일로, 휴가로 또 일로. 여행 잡지를 떠나면 가장 아쉬운 것이 여행을 더 이상 못 가는 것 아니냐고들 하는데, 무슨 역마살 팔자인지 올해도 자의로 그리고 타의로 여러 번의 짐을 쌌다 풀었다. 뭐 해외여행만 여행은 아니니, 무계획으로 떠난 국내 여행까지 치자면, 올해도 두 달에 한 번은 집을 떠나 있었던 셈이다. 그렇게 여행을 다녀온 후에는 보통 며칠간 찰떡같이 내 몸과 붙는 거실 소파에 누워 있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살만하다. 그러나 이내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나그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자, 잠시 쉬었으니 이제 다시 떠나볼까?” 그럼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다시 주섬주섬 캐리어를 챙기고, 떠나고, 돌아오고 다시 떠나고. 무한 반복의 행위를 시작한다. 언젠가부터 나에겐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길을 떠나야만 안정감을 느끼는 나그네의 유전자가 장착된 것만 같다.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 일정으로 남들보다 늦은 여름휴가를 계획해야 했다. 퇴근 후 돌아오면 강아지처럼 달려와 휴가 계획을 읊는 남편(네, 여러분 그가 변했습니다!!!)에게 미안해질 정도로 지지부진하게 끌어안고 있었던 숙소와 비행기표를 결제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출국날만 ‘목 빠지게’ 기다렸다. 극강의 더위와 극도의 스트레스가 시너지 효과를 내며 나를 짓누를 때마다 더디게만 흘러가는 시간을 참을 수 없었다(이번에 새롭게 안 사실이지만, 직업 여행자로 살면서부터 출국 날짜를 기다린다거나 여행을 설레면서 준비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더군요). 여하튼, 꾸역꾸역 한 주를 보내면, 아직 3주가 남아 있고, 2주가 남아 있고. 피니시 라인을 도무지 알 수 없는 마라톤을 달리는 기분이랄까. 빨리 감기 버튼을 지문이 사라질 때까지 눌러 어떻게 서든 그 구간을 뛰어넘고 싶었다. 그것이 휴가에 대한 기대감이나 오랜만에 찾아온 여행에 대한 설렘이었으면 좋으련만, 그건 석방을 기다리는 죄수의 마음에 가까웠다. 합리적으로 도망칠 수 있는 최후의 날을 기다리는 성실한 죄수.   



오빠와의 두 번째 여행은 다행히 우여곡절이 많았던 신혼여행보다 훨씬 순탄했다(뒤늦게 여행에 빠진 짝꿍의 이야기는 곧 올려 보겠습니다. 커밍 순). 우리는 꿀 같은 탈출을 만끽했고, 정해진 시간에 예정된 비행기를 타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돌아와야만 했다). 그토록 갈망하던 석방이 한낮 외출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안 건 집에 돌아온 지 얼마 안되서였다. 간절히 기다렸던 시간이 온데간데 없어지고, 무한대의 시간만이 우리 앞에 닥친 듯했다. 이번에 내가 아닌, 오빠가 일찍이 다음 탈출을 계획하기 시작했고, ‘도망자 티켓(항공권)’을 구하기 위해 우린 매일 밤 스카이스캐너의 바다를 헤엄쳤다. 흔히들 말하는 ‘바캉스 증후군’은 아니었다. 휴가 기간 불규칙한 생활 습관 때문이 아니라, 허무로 뒤덮인 일상의 시간을 견디기 힘들었을 뿐이다.


 뒤늦게 고백하자면, 요 근래 떠났던 여행은 일상의 소나기를 피하기 위한 도망자의 심정이 컸다. 좀 더 학술적(?)으로 바꾸자면 현실 도피. 수많은 여행자가 여행을 통해 현실을 피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내가 그중 하나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나는 대체 어떤 우월감을 가졌던 것일까. 차마 일일이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럽다. 물론 현실도피가 꼭 나쁘다는 건 아니다. 때론 일상의 궤도를 벗어나야 길이 보이는 법이니까. 하지만 도망이 반복될수록 견뎌야 할 인생의 허무는 커져간다. 여행을 거듭할수록 순수한 즐거움보다는 목적 없이 떠도는 나그네의 외로움을 더욱 이해하게 된다. 나를 떠나게 하고, 일상에서 내몬 건 결국 참을 수 없는 일상의 허무였지만, 언젠가는 이 실체 하지 않는 텅 빈 마음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다. 확신할 순 없지만 그땐 어쩌면 멀리 떠나지 않고도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다.


 내가 참 좋아하는 여행 작가 폴 서루는 우리가 어디로든 떠나고 싶은 욕망에는 새로움을 향한 동경, 호기심을 채우거나 두려움을 가라앉히고 싶은 욕망, 자신을 둘러싼 생활환경을 바꾸고 싶은 욕망 등등 참 많은 것을 열거한다. 모두 맞는 말이다. 여행을 떠나고 돌아온 후엔 이 모든 것 중 하나만 충족되어도 ‘그 여행이 참 좋았지’로 기억의 조작이 일어날 테니까.

 어찌 됐든, 지금은 떠나봐야 안다. 그것이 도망인지 모험인지 혹은 진정한 여행이 뭔 지. 집을 떠나봐야 집이 최고라는 것을 알고 텅 빈 잔고를 봐야 다시 지랄 맞은 일상과 맞설 힘이 난다. 때때로 도망자가 되더라도 스스로 그것을 인정할 수 있을 때까지, 가봐야 한다. 그러니까 체력과 돈과 정신적 스트레스 그리고 무시무시한 인생의 허무를 감내하고도 여행의 불구덩이 속에 들어가야 한다. 그것 또한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땅히 이겨내야 할 과제 중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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