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맞아?

by 너머


퇴사. D-14

퇴사를 얘기한건 6월 중순이었고, 얼마 전엔 사직서도 작성했다.

퇴사를 얘기하자마자 회사에선 채용공고를 올렸고 지원자도 꽤 된다.


근데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퇴사하는 걸 아는 사람들이 소수다.

그래서 계속 일이 끊임없이 몰리고 있다.

하던 일을 마무리해야 되는데, 인수인계서도 작성해야 되는데 작성 시간이 부족하다.

인수인계서에 공을 들여야 하는 이유는 내가 맡고 있는 업무의 범위가 꽤 넓어서..인데

다음 디자이너가 왔을 때 당황하지 않을 수 있도록, 적어도 업무 파악은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작성을 적당히 꼼꼼하게 하고 싶었는데, 대차게 실패하는 중이다.

업무 키워드만 뽑아보면 나의 업무 영역이 이렇게 넓었나? + 이걸 내가 다 했다고? 를 끝없이 느끼고 있다.


설마 전날 인수인계서 작성하라고 하지는 않겠지.. 하는 마음에 지금은 퇴사한다고 내가 소문내고 다니고 있는데 중요한 건, 내가 퇴사한다는 걸 안 사람들은 일을 몇 달 치씩 주기 시작했다.

다음 사람이 들어와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들인데 마치 다음의 디자이너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일을 몰아주고 있다.


나 없다고 회사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다음 사람은 분명 존재할 것이고 (하다못해 외주라도)

누군가가 대신할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왜, 굳이, 지금 나에게 일을 주는 건지 납득이 되질 않는다.

단지 내가 손이 빠르니까, 제품에 대해 잘 알기 때문에 말하지 않아도 찾아서 해주니까

지난번 포스터가 평이 좋아서, 매출 올려야 하니까.. 등등의 이유를 얘기하며 일을 마무리해주길 바라고 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으로 남에게 쓴소리도 못하고, 거절도 잘하지 못하는 나였는데

지금은 스케줄이 안 돼요, 일이 너무 많아요, 이게 먼저라서.. 를 얘기하며 최대한 받지 않으려고 피하고 있다.

퇴사하는 날 좋게 마무리 지으며 그간 고생 많았다 웃으며 얘기하며 사무실을 나오는 장면을 상상했는데

아무래도 이 장면은 머릿속에서 지워야 할 것 같다.


퇴사라는 선택이 과연 최선이었을까?라는 내면의 목소리에 나는 아직도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는 건

복잡하게 얽힌 문제들을 해결할 기미도, 해결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표와 상사는 애써 흐린 눈을 하며 수개월이 지나도록 방치했고 그 어떤 대답도 들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게 대표와 상사의 최선이었을 거라고 (애써) 생각하기도 하지만

좋은 선택이었다고는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이 모든 걸 겪고도 어쩌면 나는 지금의 내 선택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후회도 내 선택이고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다.

그러니 나는 정신을 똑디 차리고, 후회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

약해진 나의 몸과, 정신을 다잡으며 길고 험한 길을 갈 채비를 해야 한다.


취업이라는 관문 앞에 너무 많이 지치고 상처받지 않길.

한 번쯤은 쉬어도 된다고, 달릴 필요는 없다고.

앞만 보고 뛰는 동안 보지 못했던 하늘도 좀 보고, 지나가는 나무들도 보고,

손 틈새로 지나가는 바람도 좀 느끼면서 그렇게 쉬었으면 좋겠다.

이건 나 스스로에게도 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 글을 보고 힘들어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한 번쯤은 그래도 된다고 얘기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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