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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 Aug 30. 2023

나는 살고 싶어 글을 쓴다

내가 쓰는 이유

"애들아, J가 쓴 시가 정말 멋져. 학생이 쓴 시가 아닌 것 같아. J에게 이런 재능이 있는지 몰랐는 걸. 선생님은 정말 놀랐어. J가 일어나서 친구들에게 직접 들려주렴."


초등학교 2학년, 국어시간이었다. 기억의 조각을 맞춰보자면 대충 이런 식의 칭찬이었던 것 같다. 선생님께서는 나를 일으켜 세워 내가 쓴 시를 낭송하게 하셨다. 지독하게 내성적이었던 그 시절의 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선생님의 칭찬에 어지러울 정도였다.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시를 읊었다.


"너무 멋지다. J는 커서 꼭 글 쓰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 멋져. 모두 J에게 박수 쳐 주자."


선생님은 과분할 정도로 칭찬을 해주셨다. 내가 당시 어떤 시를 썼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의 장면은 여전히 강렬하게 남아있다. 너무 떨렸지만 처음 느껴보는 희열이었던 것 같다. 꽤나 충격적이었다. 칭찬이 이리도 한 사람을 뒤흔들 수 있다니. 그 이후 나는 많이 변했다. 더 잘 쓰고 싶었고, 더 칭찬받고 싶었다. 내가 쓴 글을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시낭송부에도 들어갔다. 너무도 내성적이어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나였는 데 말이다. 글로 나를 드러내는 법을 알게 된 것이다.


사실 내가 쓴 시는 대단히 훌륭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선생님의 칭찬은 그저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한 학생이 가여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려는 호의였을 수도 있다. 선생님의 의도가 뭐였든 간에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선생님의 그 따듯한 배려는 나를 일으켜 세웠다. 칭찬은 역시 엄청난 힘을 가진다. 20년도 훌쩍 넘긴 지금도 그날의 기억이 나를 여전히 뜨겁게 만들어 주니까 말이다. 그렇게 나는 글을 쓰겠다는 마음을 처음 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작가가 되겠다고 꿈꿨지만 대한민국 '사교육'은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나의 엄마'가 나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엄마의 '교육열'은 지금 대치동 엄마들에게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엄마는 글 쓰는 일을 '취미'정도라고 생각하셨고, 내가 반드시 명문대에 가거나 의사가 되길 바라셨다. 엄마 기준에서는 의사가 최고로 성공한 직업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꽤 공부를 잘했다. 그게 엄마의 의지를 더욱 불타게 해 줬다. 우리 형편에 어울리지 않게 온갖 유명학원을 섭렵했고, 과목마다 개인 과외를 받았다.


나는 내 꿈과 맥이 통하는 국문과를 가고 싶어 했지만 희한하게 수학과 과학성적이 잘 나왔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결국 이과행을 선택했다. 사실상 내게 선택권은 없었다. 엄마가 원하던 명문대 입학이 그 시절의 나도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좀 더 가능성 있어 보이던 이과를 선택했지만 내 성적은 가면 갈수록 하락세였다. 엄마의 욕망을 채워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나는 첫 수능에 실패했고 결국 수까지 했다. 한 달에 몇백만 원 하던 기숙학원도 다녀봤고, 엄마의 끊임없는 지원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나는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없었다. 우리 가정형편을 뛰어넘는 전폭적인 투자에도 걸맞은 성과가 없었기에 우리 가족이 느끼는 절망감은 더욱 컸다. 나는 숨고 싶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다고 느꼈다.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자책하던 나는 다시 쓰기에 매달렸다. 그것밖에는 딱히 탈출구가 없었다. 나의 절망을 토해낼 것이 필요했다. 사실 명문대에 가겠다는 꿈은 엄마의 것이었지 내 것이 아니었다. 나는 다시 글을 쓰기로 했고, 방법을 찾았다. 어쨌든 대학에도 가긴 해야 했다. 가족들에게 대학에도 가지 않은 채 작가가 되는 길을 찾겠다고 선언할 용기도 없었다. 무언가 성과를 내야 했다. 생각 끝에 나는 '예대'에 가기로 했다. 당시 유명한 배우나 작가들을 배출해 내던 학교가 번뜩 생각이 났던 것이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덜컥 실기시험도 보고 면접도 봤다. 대부분 지원자들은 실기학원을 다니며 예대입시를 준비했다. 사실 나는 당시에 아무것도 몰라서 용기가 있었던 것 같다. 더 이상 뒤로 갈 곳도 없다는 것도 나를 더 강하게도 만들었다. 운이 좋게도 나는 '예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가족들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응시한 시험이었는 데, 결과가 나온 후 오히려 가족들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누구나가 부러워할 대학을 가지 못할 바에는 아예 비교 불가한 예대가 나아 보인다는 계산이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예대에 입학하자 엄마는 본인 친구들에게 J가 예술가가 될 거라고 말하고 다닌 것으로 안다.


생각해 보면 내면의 바닥을 허우적거릴 때마다 나를 일으켜 준 건 '글쓰기'였다. 학교 가는 게 지옥 같았던, 지독히도 소심한 초등학생 시절 꿈을 갖게 한 것도 글쓰기였다. 수 끝에 엄마의 희망을 잔인하게 짓밟고는 내 인생도 끝이라고 생각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전업주부 10년 차,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육아와 살림뿐이라고 절망하고 있었던 얼마 전도 그러하다. 나는 또 글쓰기로 일어나고 있다. 나는 살고 싶어 글을 쓴다. 글을 쓰면 나를 세상에 내놓고 있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것이야 말로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현실감을 느끼게 해 준다. 그게 내가 글을 쓰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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