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로 또다시
변화해야 한다고 모든 것들이 말한다
"너도 친구들 좀 자주 만나고 살아. 맨날 나한테만 놀아달라고 하지 말고."
스케줄표를 뒤적이며 가족나들이 날을 체크하는 내게 남편이 짜증스럽게 말한다. 비가 오는 바람에 야구를 가지 못해 어지간히 심술이 났나 보다.
"당신 쉬는 날 중에 당신 야구 가는 날, 모임 있는 날, 가족행사 있는 날 빼고 도대체 언제 친구 만나러 가란 소리야. 그리고 애는 언제 부모랑 같이 시간을 보내. 남들은 주말이면 가족끼리 여행 가고 애들 체험행사 같은 거 가느라 바빠."
아차, 남들과의 비교를 극도로 싫어하는 남편에게 싸움의 빌미를 제공했다. 나의 공격적인 말에 전투력이 상승한 남편은 여태껏 쌓였던 불만을 쏟아낸다.
"야, 나는 그럼 언제 쉬냐. 내가 남들하고 같아? 주말마다 꼬박꼬박 쉬는 직장인하고 같냐고. 아주 남들 어쩌고 하는 거 진절머리가 나. 비교 좀 하지 마. 짜증 나니까. 한 달에 내가 몇 번이나 쉬냐. 그 쉬는 날 내가 하고 싶은 것 좀 하고 살면 안 돼? 내가 뭐 불건전한 거 해? 야구하고 당구치고 운동하고 사람들 만나는 게 다 아니야. 너는 내가 건강하려고 운동하는 것도 싫지. 사람 만나서 스트레스 푸는 것도 싫고. 나는 무슨 낙으로 사냐 그럼. 내가 돈 버는 기계냐."
"그럼 나는? 나는 뭐 맨날 애 보고, 쉬는 날이 있어? 애는 맨날 아빠 언제 쉬냐고 하고, 당신 쉬는 날 어떻게든 우리 세 가족 같이 시간 보내려고 하는 게 내 잘못이야? 친구 좀 만나라고? 만날 시간이나 주고서 그런 말을 해. 애나 좀 봐주고 그런 소리를 하라고. 이사 온 후로 서울로 친구들 만나러 나가면 어디 한두 시간으로 되는 줄 알아? 맨날 자기 운동하고 사람 만나는 거 다 하면서 가족 하고는 도대체 언제 시간을 보내겠다는 거야. 당신 남들보다 바쁜 직장 다니는 거 나도 감수하고, 애도 감수하며 살아. 철없이 좀 굴지 마!"
"너랑 무슨 말을 하냐. 지겹다 지겨워."
서로 자기 입장만 고수한 채, 한 수도 지지 않는 대화는 끝이 났다. 나는 분에 못 이겨 눈물을 쏟으면서도 남편을 죽일 듯이 노려본다. 남편은 자기가 얼마나 화가 났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문을 있는 힘껏 '쾅' 닫고 나가버린다. 담배를 태우러 나가나 싶었더니 그사이 차키도 챙겨 나갔다. 아, 싸움을 핑계로 친구를 만날 셈이구나. 속이 부글부글 거린다. 자기 딴에는 싸움이 커질까 봐 자리를 피하는 것이겠지만 싸울 때마다 '옳다구나' 친구를 만나러 꼴이 보기 싫다. 좀 치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남편의 휴일에 또 나는 독박육아 확정이구나. 언제부터인가 이러려고 일부러 싸우나 싶은 못된 생각도 든다.
어느 순간부터 남편은 나를 버거워했다. 오로지 남편과 자식을 전부라고 알고 사는 나를 답답하게 여겼다. 언제는 '현모양처'라고 좋아하더니 웃긴다. 살림과 육아는 안정적으로 해주길 바라면서 자신을 놓아주기를 바란다. 자유롭던 총각 때를 아직도 그리워하는 것 같다. 그럼 결혼은 도대체 왜 한 걸까. 그냥 혼자 번 돈으로 쓰고 먹고, 친구도 실컷 만나고 자유롭게 살지.
남편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힘들게 일하고 쉬는 날 쉬고 싶을 테다. 극강의 사교성을 지닌 나의 남편이 쉬는 법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다. 남자 나이 마흔을 넘기면 인간관계도 많이 정리된다고 하는 데, 나의 남편은 예외다. 여전히 주변에 사람은 넘친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힘을 얻는 남편이 결혼생활을 힘들어한다는 것은 진작에 알았다. 운동도 좋아하고, 밖으로 도는 남편을 꾸역꾸역 집에 앉혀놓으려고 하는 것은 내 욕심일 수도 있다. 남편을 잘 아는 지인들은 나보고 그만 포기하라고 한다. 남자들은 잡을수록 더 엇나간다고.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 데, 내려놓기가 쉽지가 않다. 여전히 나는 남들보다 가족이 최우선인 가정적인 남편을 원한다. 남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가장 가치 있다고 여기길 바란다. 나도 내가 바라는 대로 내 욕심대로 남편이 해주기만을 바라는 거다. 결국 우리는 이기적인 인간들이다. 남편이 가족을 등한시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남편도 바쁜와중에도 쉬는 날이면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게 내가 원하는 기준과 다를 뿐이다. 남편은 그저 사람들과 어울리고 재미있게 살길 바라는 것이다. 원래 사람은 자기 생겨먹은 대로 사니까 말이다.
남편과 결혼 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우리가 결혼까지 했을까 놀라웠다. 우리는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이다. 사교적인 남편과 다르게 나는 지독한 집순이다. 남편은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얻지만 나는 관계 속에서 에너지를 빼앗긴다. 혼자만의 시간으로 에너지를 축적하고 사람들을 만나서 발산한다. 집순이지만 사람들을 만나면 매우 사교적인 사람의 '탈'을 쓰기 때문에 금방 방전이 되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는다. 사실 출산과 육아로 인해 친구들을 자주 못 보는 것은 전혀 내게 힘든 일이 아니었다. 결혼 후 1년에 한 번 만나면 친한 사이라고 여길정도다. 내게 남편이 가장 친한 친구고 애인이었다. 나는 그렇게 사는 게 좋았다. 나는 남편과 보내는 시간이 참 좋았다. 그게 좀 일방적이어서 문제인 거다.
생각해 보니 남편입장에서는 참으로 숨이 막혔을 만하다. 오로지 자기만 바라보는 아내가 답답했을 거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꺼려하는 내가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을 가리는 내가 잘못된 거라고 했다. 사람은 어울리면서 살아야 한다고, 제발 너만의 세상에서 빠져나오라고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육아를 하며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홀히 했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 정말 맘 편히 소통할 친구가 이제 정말 몇 명 없다. 핑계를 대보자면 결혼 후 여자들은 생각보다 처녀시절과 굉장히 많이 변한다. 특히 인간관계가 많이 정리된다. 물론 성격에 따라 다르겠지만 예전 생활보다는 가족중심으로 인생이 변한다. 주변만 둘러봐도 애 키우는 엄마들 중 나 같은 이들이 정말 많았고, 그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워킹맘이 아닌 이상 사회적인 관계도 줄어들고, 동네 아이 친구들 엄마가 절친이 되기 쉽다.
남편은 내가 사교적이지 않은 성격은 그렇다 쳐도, 너무 자기와 아이만 바라보고 살지 말라고 했다. 나만의 인생도 생각해 보라고 말이다. 처음에는 그것이 자기를 놓아달라는 소리로 삐딱하게 듣기도 했지만 곱씹을수록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는 점점 자신만의 세계를 찾을 거다. 언제까지 품 안에 자식은 없으니까. 남편은 진작부터 나와 좀 떨어져 독립적인 인생을 살기를 바랐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나는 더 이상 잡히지 않는 것들은 억지스럽게 쥐고 있을 수는 없다. 변화해야 한다고 모든 것들이 말해주고 있다.
주변을 봐도 서서히 변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엄마들이 많다. 특히 다시 일을 찾는 엄마들이 많아진다. 형편상 본래 하던 업으로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환경에 맞춰 자기 일을 찾는다. 꼭 일을 하지 않아도 운동을 열심히 하거나 취미를 갖는 등 자신만의 시간을 꾸려나간다. 우리는 모두가 알고 있다. 소중한 가족도 중요하지만 나 자신도 중요하다는 것을. 돌고 돌아 자신에게 집중할 시간이 온다.
그렇게 나도 그 변화의 시간이 왔다. '나에게로 또다시' 오늘도 한 발짝 나설 때다. 결혼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 이들에게 응원의 말을 건네고 싶다. 우리 다시 잘 살아보자고. 행복의 주체가 가족이 아닌 내가 돼 보자고 말이다.
오늘도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나와 당신을' 간절히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