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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 쿡 Jul 10. 2024

내가 입고, 먹던 모든 것은 마늘밭에서 나왔다.

MZ가 들려주는 MZ는 모르는 집성촌 이야기 (3)



버섯 농사에는 많은 기름값이 들어가기 때문에 마늘 농사도 허투루 할 수 없었다. 오전에 밭에 나가 버섯을 따는 저녁 무렵이 되기 전까지는 마늘 농사를 지었는데, 아직도 6월이면 삭신이 쑤신다.*


*6월은 본격적인 마늘 수확 시기로 이 시기에 많은 시골 출신 청년들이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내려간다. 정말 많은 노동력이 들어가기 때문에 부모님을 생각하면 도저히 도시에서 편하게 지낼 수가 없다. 물론 무언의 압박도 크게 작용한다.


마늘 농사는 내가 경험한 모든 농사 중 손에 꼽을 만큼 힘들다. 어느 농사가 힘들지 않겠냐마는 마늘 농사처럼 일손이 많이 들어가는 농사를 본 적이 없다. 나는 운동선수 출신이고, 특수부대 경험까지 있는 사람인데, 마늘 농사는 차원이 다르다.


이건 사람이 할 짓이 못된다.


일단 마늘을 수확하기 위해선 당연히 먼저 마늘을 심어야 한다. 그냥 심는 것이 아니라 겨울을 나기 위해 마늘을 심은 뒤 비닐을 덮어야 한다. 당연히 혼자서는 하지 못한다. 비닐을 양쪽에서 잡아줄 1인 이상이 필요하다.


마늘을 심으면 마늘이 나는 것을 알고 계신지 모르겠다.


이듬해 봄이 되면 비닐을 걷어야 한다. 당연히 혼자서 하기에는 너무 버겁다. 성인 남성도 흙에 묻힌 비닐을 걷는 것은 매우 고된 일이기 때문이다.


그다음은 마늘을 캐야 한다. 마늘을 캐기 위해서는 밭을 갈아야 한다. 기계가 없을 땐 소를 썼다. 그래서 우리 집은 소를 키우는 공간이 있었다. 이후엔 빚을 내서 경운기를 사서 밭을 갈았고, 훨씬 뒤에는 트랙터를 구입해서 밭을 갈았다.


경운기로 밭을 가는 모습


밭을 갈았으면 이제 마늘을 뽑아야 한다. 마늘을 뽑은 뒤 정성스럽게 탈탈 털어서 펼쳐준다. 비라도 오면 마늘을 뽑을 때 주변의 흙이 다 붙어서 뽑힌다. 혹은 마늘대는 잘리고 마늘만 뽑히거나, 대만 뽑힐 때도 있다. 


터는 것은 더 힘들다. 비가 오면 흙이 뭉쳐서 털어지지도 않고, 혹여나 흙을 깨끗하게 턴다고 마늘을 새게 털다 보면 마늘이 다 상하는데, 그러면 상품으로 출하를 하지 못한다. 그래서 조심하다 보면 작업 시간은 2~3배 이상 길어진다.


한쪽에서는 마늘을 캐고, 다른 한쪽에서는 마늘을 묶는다.


마늘을 뽑아서 다 털어서 밭에 놓아두었다면, 이제 묶는 팀이 뒤에서 오면서 마늘을 한 단 한 단 묶는다. 아마 시중에서 빨간색 철사로 감겨 있는 마늘 뭉치들을 많이 보셨을 것이다. 바로 그 뭉치 하나가 마늘 한 단이다.


다 묶었으면 이제 묶은 마늘을 경운기든, 차든 실어서 날라야 한다. 건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건조라고 하면 빨래 건조기 같은 것을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그런 인공적인 건조대가 아니라 지붕과 골격만 있는 건물을 하나 지은 다음 그 안에 막대로 골격 끝과 끝을 이은 뒤 막대에다가 마늘을 거는 것이다. 


자, 건조대까지 왔으면 70%는 성공이다. 이제 허공에 막대만 놓고 걸기만 하면 된다. 쉽냐고? 나는 몇 년에 한 번꼴로 떨어졌고, 내 남동생은 밑에서 마늘을 올려주다가 2년에 한 번은 막대가 떨어져서 머리를 부딪힌다.


허공에 떠서 마늘을 걸 때면 없던 고소공포증이 생긴다.


이게 왜 아직도 자동이 안되는지 모르겠는데, 마늘은 거의 모든 작업이 수작업이다. 그래서 정말 많은 인력이 필요하고 힘이 많이 드는 농사다.


그래서 마늘 수확이 끝나면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항상 병원에 가셔야 했고 지금도 병원에 가신다. 물론 30대가 된 나도 이제는 힘들어서 마늘을 캐고 오면 며칠간 직장 생활을 하기가 힘들다. 내 예비 신부는 한 번 왔다가 한 달 동안 시름시름 앓았다.


그 많은 인력이 필요한 마늘 농사이기 때문에 당연히 인건비도 많이 들어간다. 그래서 부모님은 인건비를 최소화하고 본인들이 더 고생하는 것을 택하셨다. 어… 우리 남매들도 포함이긴 하다.


다행히 우리 아버지께서는 정말 좋은 친구들이 옆에 있으셨다. 고등학교 친구들 열 분 정도가 거의 20년 이상을 해마다 오셔서 마늘 농사를 도와주신다. 아무리 친한 친구들이라도 그 힘든 일을 20년 이상 와서 돕는다는 것은 나는 아직 들어본 적이 없는 우애다.


그걸 배운 나는 중학교부터 친구들을 집에 데려갔다. 일을 하고 난 뒤 친구들과 함께 어머니가 해주시는 솥뚜껑 닭갈비를 맛있게 먹었다.* 20대가 되고서는 술도 한 잔 곁들였고, 알코올 중독이던 나는 대차게 술을 마셔댔다.


*솥뚜껑 닭갈비는 정말 특별했는데, 솥뚜껑에 가스를 연결했기 때문에 버너랑은 차원이 달랐다. 그리고 우리 집에서 키운 야채를 넣었기 때문에 야채 반, 닭 반이었다. 닭은 5일장에서 구매해서 손질하여 넣고, 조리 중 움푹 들어간 솥뚜껑 중앙에 소주를 반 병 정도를 부어서 잡내를 원천차단했다.


우리 집 닭갈비는 이것보다 야채가 훨씬 많이 들어간다.


내 친구들은 그날 피로와 술기운에 몽롱해졌지만, 그 맛을 잊지 못해서 다 자란 지금도 그때의 닭갈비를 또 먹고 싶다고 매번 말한다. 아마 말 뿐이겠지만. 또 경험하고 싶지 않은 농사일일 것이다. 뭐, 이해는 하지만 아버지 친구들을 보면 좀 서운하긴 하다.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입은 옷, 먹은 음식, 용돈 등의 대부분은 마늘 농사에서 비롯되었다. 정말 힘든 일임을 몸으로 겪었기 때문에 지금도 1순위는 가족이고, 가장 원하는 일이 부모님을 위한 집다운 집을 지어 드리는 것이고, 부모님이 농사를 그만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처럼 그게 잘 안될 때마다 나는 잦은 죄책감과 자책에 빠진다. 술을 마시다 어머니 이야기라도 나오면 눈물을 글썽거리며 전화기를 집어든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둥 ‘저녁은 드셨냐?’면서 안부를 묻는다.


가장이 될 준비를 하고 있는 지금은 아버지의 무게감도 느낀다.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아낄지, 조금 더 벌지, 내 가족에게 뭘 더 해줄 수 있을지, 그리고 내가 뭘 포기하면 될지.


그러면서 ‘술을 포기하면 건강도 챙기고, 돈도 아낄 수 있지 않을까?’라면서 자조하는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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