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디터쿡 Jul 07. 2024

버섯 농사의 무한 굴레와 ‘품앗이’

MZ가 들려주는 MZ는 모르는 집성촌 이야기 (2)



소작 쟁의는 하지 않았다. 진짜다.


소작농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소작농은 토지를 지주로부터 빌려서 경작하는 사람을 말한다. 맞다. 우리 가족은 소작농이었다. 운이 좋게도 지주 분이 고약하신 분이 아니었고, 그 땅을 경작할 생각이 없던 분이라 큰 지출 없이 우리 땅처럼 소작을 지을 수 있었다.


그렇게 특산물인 마늘을 키웠고 마늘밭을 조금씩 조금씩 늘려 나가던 차에 근처에서 농사를 지으시던 아버지 또래의 아저씨들이 특용 작물 재배를 시작했다. 그 작물이 바로 버섯이었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갑자기 속이 울렁 거린다. PTSD인가.


느타리버섯을 키웠는데, 사람들이 느타리버섯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실이 있다.


첫째, 온도에 ‘엄청나게’ 민감하다는 사실이다.


여름에는 에어컨을 틀어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난방을 틀어주어야 했다. 그래서 버섯을 팔아서 버는 돈보다 기름값이 더 나갔다. 그래서 버섯 농사 외에 마늘 농사를 계속 더 크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우리 집은 재작년이었나? 그쯤이 돼서야 처음으로 집에 에어컨을 들여놓았다. 그전까지는 30년 된 선풍기로 버티며 살았다. 버섯의 삶이 더 나아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둘째, 여름철 느타리버섯은 ‘엄청나게’ 빨리 자란다.


버섯 종균 배지에서 다 큰 버섯을 수확한 후 2시간 뒤에 다시 가보면 그전에는 수확하기에 작았던 버섯이 다 자라 있었다. 느타리버섯은 너무 커져 버리면 상품성이 없어지기 때문에 거대해지기 전에 수확해야만 했다.


이렇게 퍼져 버리면 더 이상 상품 가치가 없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가?


새벽 2시에서 3시까지 버섯을 따야 한다. 돌아서면 커 있고, 돌아서면 커 있다. 진짜로 확인하고 싶다면 근처 느타리버섯 농장에서 한 번 일해보길 추천한다. 지금 딱 여름이 다가오고 있어 쉽게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따서 팔면 끝인 느타리버섯이 아니다.


마트에 가보면 느타리버섯을 쉽게 찾을 수 있는데 버섯 옆에 손톱만큼 작은 느타리버섯이 붙어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떼버리기엔 아깝고 버리기엔 아쉬운 그런 버섯 말이다.


그건 대량으로 버섯을 팔아서 따로 손질을 안 해서 옆에 붙어있는 것이고, 원래는 먹을 수 있는 부분 외에는 뾰족하게 밑을 다듬어서 옆에 있는 필요 없는 버섯 애기(?) 들을 다 쳐내고 다듬어서 공판장에 출하한다.


옆에 꼬다리처럼 달린 부분을 다 잘라내어 팔았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집은 새벽까지 버섯을 수확한 후 냉동창고에 저장해 두었고, 집에서는 그동안 전날 혹은 그날 수확한 버섯을 꺼내서 새벽까지 다듬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버섯 수확 → 냉동 창고 보관 → 버섯 다듬기 → 버섯 수확 → 냉동 창고 보관 → 버섯 다듬기를 무한 굴레처럼 반복했다는 뜻이다.


이 무한 열차 탑승에 어린 나와 여동생도 예외는 아니었다. 남자라 힘이 있었던 나는 버섯을 수확해서 냉동 창고로 옮겼다. 그리고 여동생과 어머니가 다듬어 둔 버섯을 다시 냉동 창고로 옮겨서 보관하고, 다음 날 오후 12시에 차에 실어 공판장으로 보냈다.


여동생은 어머니와 함께 버섯을 다듬고 포장하는 일을 도맡아 했다. 물론 수확을 안 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 수확의 정도가 나보다는 적었을 뿐이지 여동생도 엄청나게 고생했다.*


*참고로 내 여동생은 학창 시절 내내 1등을 거의 놓친 적이 없는 정말 우수한 수재다. 그런 그녀가 어쩔 수 없이 농사일을 도와야 했다는 사실이 어린 나이였지만 오빠로서 미안한 마음이 컸다.


이러한 것들을 차치하고서 막상 가장 힘들고 외로우셨을 분은 어머니였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이 버섯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새벽까지 농사일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하지만, 그 당시 우리 할아버지는 이상하게도 새벽 5시만 되면 우리 집으로 전화를 거셨다. 전화하시는 이유는 ‘오늘 뭐 하는지’, ‘무슨 농사를 짓는지’, 또는 ‘오늘 뭘 해야 한다.’든지 뭐 그런 이유였다. 아침에 해도 될 전화를 꼭 새벽에 하셨다.


이게 뭐라고 없애지를 못했나.


전화를 안 받을 수 없었던 우리 가족은 항상 새벽에 잠들어서 새벽에 깨야 했고, 조부모님을 모셔야 했던 어머니는 버섯 농사를 하던 몇 년 동안은 거의 잠을 못 주무셨다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스마트폰이 보급되고, 점차 가정에서 전화기가 없어질 무렵 우리 집에서도 전화기는 퇴출되었다. 그제야 어머니는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로 심했던 전화벨 소리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래도 정말 다행인 점은 그 당시에는 ‘품앗이’가 잘 되어 있어서 동네 어르신들이 오셔서 버섯 다듬는 작업을 함께 해주셨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그런 할머니들을 위해서 돌아가실 때 항상 버섯 2kg짜리 버섯을 챙겨 드렸다.


둥그렇게 둘러앉아 이렇게 버섯 작업을 했다.


파는 물건이었지만 그게 대수인가. 할머니들은 나와 여동생이 일손을 돕는다는 것만으로도 '예쁘다.', '착하다.'고 항상 칭찬해 주셨고 새벽이 되어서야 작업이 끝나는 경우가 허다했음에도 끝까지 도와주시려고 노력하셨다.


한편, 우리 아버지는 공업 고등학교를 나오셨기 때문에 기계를 잘 다루셨고, 덕분에 마을의 모든 논과 밭에 기계가 필요할 때면 품앗이를 나가셨다.


참고로 우리 마을은 연못에서 물을 당겨와서 급수를 했는데, 겨울이면 얼어버려서 낮이고, 밤이고, 새벽이고 물이 나오지 않으면 우리 집으로 전화가 왔다.


이걸 왜 그 깊은 골짜기에 설치했는지 의문이다.


그러면 아버지는 얼어붙은 수도를 고치기 위해서 골짜기로 향하셨다. 물론 나와 함께.


혹시 내가 우리 마을 골짜기엔 멧돼지가 출몰한다고 말했던가?


그리고 1편에서 말했던 무덤이 100개 있어 '백마또'라고 불린다던 그 장소는 기억을 하실는지? 


그 당시 골짜기에서 귀신에 홀려 맨발로 피를 철철 흘리며 마을로 돌아오셨던 할아버지도 있었다.




이전 04화 아궁이와 푸세식 화장실, 그리고 이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