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디터쿡 Jul 15. 2024

집성촌 마을 제사와 도련님

MZ가 들려주는 MZ는 모르는 집성촌 이야기 (4)

요새 집안 제사는 모두가 꺼리는 행사 중 하나다.


어떻게라도 음식을 줄이기 위해서 제사 음식을 주문하기도 하고, 제사 시간을 앞당기기도 한다.


그뿐인가.


명절에 제사를 지내는 집안은 못 산다는 이야기도 한다. 동남아 등지로 여행을 가기 때문이다.


명절 증후군 타파를 위한 동남아 여행이라니. 부럽다.


그래서 장남, 장손은 인기가 없다 했다.


맞다. 나는 장손이다.


우리 집은 종갓집은 아니지만 제법 규모(?)가 큰 집안이었다.


나는 이미 중학교부터는 정장을 입고 제사를 지냈고, 지금은 제사할 때 옆에서 음식과 술잔을 옮기는 역할을 한다.*


*아실 텐데, 제를 지낼 때 순서에 따라 수저를 옮기고, 술잔을 따라 드리고 비우는 그런 역할은 보통 큰 어른이나 큰 어른의 자식들이 한다. 우리 집은 아버지가 하셨고, 이후엔 나도 하게 되었다.


좌측이 어린 나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보통 명절에는 다 같이 모여 식사하고 식사하면서 술 한 잔 기울인 후 주무시거나 당일에 파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 집은 달랐다.


거짓말 안 하고 거의 100명은 명절에 왔던 것 같다. 


‘갑바천’이라고 해서 이름이 생소할 수 있는데, 보여 드리는 사진을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 천을 마당에 깔고 그 위에 모든 명절 음식과 술상을 차려서 친척들과 먹었다.


그뿐만 아니라, 제사를 가서도 갑바천을 깔고 음식을 먹었다. 특히, 묘가 4개가 모여있는 우리 집 선산에 가면 꼭 밥과 술을 먹고 내려왔다. 나는 연신 음식을 날랐고.


이걸 2~3개 펼치면 수 십명도 거뜬하다.


그 당시 큰할머니 친척분이 대게 어업에 종사하셔서 항상 아이스박스로 대게가 한 박스 왔는데, 그것만 기다렸던 것 같다. 거의 4~5마리를 먹고 밥에 비벼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보통 해수욕장 가면 많이 볼텐데, 우리 집은 대게 박스로 사용되었다.


우리 마을에는 또 하나의 명절 의식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마을 제사다.


우리 마을은 집성촌이었기 때문에 거의 모든 마을 사람이 친척 관계로 묶여 있었다. 우리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명절에는 가장 윗대의 가족묘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


지금도 명절에는 큰 어르신의 묘에 가서 제사를 지내고, 아버지는 네이버 밴드를 통해서 가족 제사와 벌초 일정과 관련한 커뮤니케이션을 하신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참여 인원이 줄고 있긴 하다.


또 하나의 마을 제사가 있는데, ‘문중’이라고 해서 마을에 있는 정자에 가서 제를 지내는 것이다. 조상을 모시는 건물이 있었고, 어르신들은 날짜가 되면 모여서 우리 가문의 조상에게 제를 지냈다.*


*어렸을 적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좀 안타까웠던 부분이 있다. 어머니가 마을 제사와 집안 제사 음식 모두를 챙겨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음식을 이웃집에 가져다 드리는 풍습도 있었는데, 그 양까지 생각하면 정말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을 하셨을 것이다.


지금은 자선 봉사가 많은데, 예전에는 집집마다 남은 전과 음식을 날라다 드렸다.


100명에 달하는 명절 참석 인원과 마을 제사까지, 이 이야기를 들으면 아무도 나와 결혼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근데 이것으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앞서 말했는데, 우리 마을은 집성촌이기 때문에 모두가 친척과 가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누가 8촌인지, 6촌인지, 4촌인지에 민감하다는 것이다.


우리 어머니는 나보다 2살 위였던 동네 형에게 ‘도련님’이라는 호칭을 썼다. 그 집안이 우리보다 웃어른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나와 형은 어렸고, 동네에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정말 친하게 지냈다. 활을 만들고, 산에 움막을 쳐서 아지트를 만들고, 비석 치기도 하고, 산에서 구르기도 하고.


그 이름. 도련님.


그런 형이 한 번은 우리 집에 놀러 왔는데, 어머니가 '도련님', '도련님' 하면서 동네 형을 대했다. 그리고 그 형은 다시는 우리 집에 놀러 오지 않았다.


2살 위라고 해 봤자 그 당시 나이가 8살, 10살밖에 안 되던 형이었는데, 도련님이라는 말을 들으면 얼마나 부담스러웠을까.


그리고 그 어린 아기한테 도련님이라고 하는 우리 어머니는 또 어땠을까.*


*우리 마을에 아이라곤 나, 여동생, 남동생, 그 형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하나밖에 없던 형을 잃었던 것 같다. 이 기회를 빌려 잘살고 있냐는 안부를 묻고 싶다.


지금은 제사도 간소화되고, 집안끼리의 왕래도 많이 줄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고, 불필요하고 불합리한 것들은 축소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 어린 시절이 그립다.


어려서 아무 일도 안 하고 주는 음식을 먹고, 놀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우리 가족과 친지들을 만날 수 있었고 동네 형과 밖에서 뛰어놀 수 있었다.


지금은 사촌 사이만 아니어도 누가 누구인지 모른다. 아니 사촌은 알까?


동네 형? 옆집에 누가 있는지, 아랫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다.


아, 최근 이사를 하고서 집에서 수확한 마늘을 옆집과 아랫집에 가져다 드렸다. 나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근데 요즘은 그런 문화가 없단다.


아무튼 마늘을 받은 분들은 대단히 만족하셨고, 쪽지를 주시면서 본인들도 햇감자, 외국 과자 등을 우리 집에 나누어 주셨다.


그리고 쪽지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요새 이런 게 잘 없는데, 이렇게 신경 써서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자계의 에르메스 홍감자.


외국 과자도 주셨는데, 일본어를 모른다. 죄송하다.


솔직히 내가 아재인지, 아니면 시쳇말로 ‘틀딱’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게 진짜 이웃 간의 사이고,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공동체의 관계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