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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쿡 Jul 21. 2024

분교 다니던 시골 소년, 육상 선수가 되다.

MZ가 들려주는 MZ는 모르는 집성촌 이야기 (5)

폐교 이후 사진밖에 남아 있지 않다.


우리 학교는 전교생 43명에 불과한 분교였다.


우리 반은 총 8명이었고, 남자가 넷, 여자가 넷이었다. 그러다 1명이 선교 활동으로 코스타리카에 가게 되면서 7명이 되었다.


내 여동생 반은 더 심각(?)해서 여자가 둘, 남자가 하나였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학교에서는 한 학급 교실 안에 2개의 반을 운영했다. 칸막이로 가벽을 설치하고, 한쪽에서는 1학년 수업을, 한쪽에서는 6학년 수업을 진행했다.


다르게 생기긴 했는데, 이것과 비슷하게 생긴 칸막이였다.


양쪽 선생님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수업하는 것은 지금 생각해 보면 꽤 황당하고, 웃긴 일이긴 하다. 하지만, 시골 학교의 정겨움이 느껴지는 기억이기도 하다.


그렇게 학교생활을 보내던 중 3학년쯤이었나? 여학우들과 체육 시간에 70m 달리기 시합을 하게 되었다.


역도를 하셨던 아버지와 발레를 하셨던 어머니 사이에서 나온 아들이었기에, 그리고 남자였기에 무조건 1등을 할 줄 알았다.


결과는 대패. 


나는 그 길로 담임 선생님께 육상을 시켜 달라고 했다. 하지만, 분교에 육상부가 있을 리 만무했고, 내 긁힌 자존심을 회복하는 데 긴 시간이 필요했다.


전학 간 읍내의 한 학교


4학년이 되던 해 우리 학교가 최종 폐교 결정이 나면서 인근 초등학교와 통합을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부모님께서는 왜 굳이 학교를 통합하는 데 같은 시골에 있는 학교끼리 하느냐며 반대하셨다.


가까운 학교와 합쳐서 학교를 보내면 된다는 의견과 읍내에 있는 초등학교로 보내야 한다는 의견으로 갈리게 되면서 한참을 흐지부지하던 전학 문제는 읍내 초등학교로 보내는 것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4학년 입학식 다음 날, 나는 육상부로 찾아갔고, 오전 조깅 세션에서 학교 육상부 형, 누나들을 따라 운동장을 27바퀴를 돌았다. 그렇게 나는 육상부에 입단했다.


육상부 생활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매일 오전 조깅을 할 때면 여학우들이 항상 울었다. 시간 내에 운동장 1바퀴를 돌아야 했고, 초수는 바퀴를 거듭할수록 빨라졌기 때문이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파이팅’을 외치면서 들어오는 여학우들을 볼 때면 정말 안쓰러웠다.


27 바퀴면 몸풀기로만 5km 이상을 뛰는 셈이다.


하지만, 내 코가 석 자라고 나도 편하지는 않았다. 우리 육상부 코치 선생님은 조깅할 때 항상 오토바이를 타고 옆에서 호통을 치셨다. 그리고 장난으로 ‘비비탄’ 총을 멘 뒤의 선수들에게 쏘곤 하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큰일 날 행동이긴 했다.


당시 운동부는 체벌할 수 있었기에 허락된 행동이었을 것이다.*


*엄격한 것으로는 도 내에서도 유명했는데, 말썽을 피우거나 일탈하면 가차 없이 손찌검이 날아왔다. 우리 학교는 특이하게 중, 고등학교 선배들도 함께 운동했는데, 아무래도 운동선수들이다 보니 사고를 칠 때가 종종 있었고 그날은 음…그 선배에게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이었을 것이다.


내 사진은 아니지만 이런 장면은 비일비재했다.


나는 중, 장거리 선수였기 때문에 조깅 훈련을 더욱 혹독하게 받았다. 훈련이나 대회에 참가할 때면 분명 같이 운동하는 사이인데, 나는 동정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100m, 허들, 높이뛰기, 멀리뛰기 등을 해서 단거리만 달리면 되는데, 나는 수천에서 수만 미터를 매일 뛰기 때문이었다. 


표정부터 다른 장거리 육상 선수들 


그렇게 1년, 2년 정도가 지났나? 잠재력이 있었던 건지, 아니면 훈련량이 많아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고향에서는 내가 가장 빠른 선수가 되어 있었다.


아니, 도에서도 제법 우수한 선수가 되어서 전지훈련과 합숙도 할 수 있게 되었고, 이렇게만 자라면 학교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선수가 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부모님이 그러듯 자식이 운동한다고 하면 좋아할 리가 없었다. 당연히 우리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육상부 코치 선생님께서 운동으로 대성할 수 있다고 하셨지만, 부모님은 눈 깜짝하지 않으셨다. 그도 그럴 게, 비인기 종목인 육상이었고 그중에서도 힘들다고 정평이 나 있는 중, 장거리, 마라톤 종목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운동을 더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이미 학교 운동회와 각종 대회에서 수십 번의 수상을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증명도 한 상태였다.


그래서 중학교까지만 더하겠다고 했지만, 어정쩡하게 할 바엔 빨리 그만두는 것이 낫다고 거듭해서 말씀하시는 부모님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 당시 학업도 나름 했던 터라 부모님의 기대가 더 컸을 수도 있다.


그렇게 나는 중학교 1학년 때 육상 선수 생활을 그만두게 되었고, 이후부터는 학교 이름을 건 ‘육상장기타기’ 대회나 ‘군민체전’과 같은 대회 위주로만 육상을 하게 되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체육 선생님이 부모님을 설득해 봤는데, 거절을 당하셨다. 그래서 우리 부모님은 내가 시합도 안 나간 줄 아신다. 하지만 체육 선생님이 수행평가 D를 준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시합’은 참여하였다.


왜 육상장기타기라고 하는지 아직 그 뜻을 모른다.


아쉽게 육상은 그만두게 되었지만, 몇 년 동안 1분 1초를 단축하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했던 경험은 성장하면서 다른 영역에 끝없이 도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후 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게 해 준 것도 육상의 힘이 컸다. 또, 명문고 진학에 대한 욕심을 부리고 도전한 것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더욱이 부모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인정 욕구가 날로 커지면서 (집성촌에서의 어르신들의 칭찬, 육상부 엘리트, 성적 우수 학생 등)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기보다는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노력하는 삶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방식은 나의 자존감을 망가뜨리는 결과로 이어졌고, 잦은 낙담과 비관 속에서 성인이 된 후 알코올에 의존하게 된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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