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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 쿡 Jul 29. 2024

운동선수는 공부를 못한다는 편견을 버려라

촉망받던 육상 선수, S대를 꿈꾸다. (1)




보통 운동선수라고 하면 공부를 등한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운동을 그만두었을 때는 사회적인 약자가 될 것이라 여긴다.


맞다. 어느 정도는.


나 역시 중학교 때 육상을 그만두게 되면서 학업을 다시 배워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나는 그 당시 영어 단어를 오선지(?)에 바르게 쓰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요즘은 유치원 때 이미 영어를 한다고 하던데, 아무튼 나는 그랬다.


빨간 줄 밑으로 내려쓰는 게 맛이었다.


수학은 더 못해서 거의 찍다시피 하는 수준이었다.


그나마 체육은 자신이 있었고, 예체능은 어느 정도 소질이 있었다. 그리고 한문과 사회를 좋아해서 이 부분은 따라갈 수가 있었다.


하지만 기초 과목인 수학과 영어를 못했기 때문에 대책이 시급했다. 


방법은 하나였다. 또다시 나를 갈아 넣는 것.


영어의 경우 다른 친구들은 영어 단어를 그냥 쓰면서 스펠링을 외웠는데, 특이하게도 나는 영어 발음을 외우는 것을 먼저 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영어 발음 기호를 보면 신기하게 생기고, 뭔가 궁금증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이 방법이 내가 S대에 석사로 입학할 수 있는 영어 성적을 만들어주었고, 현재 외국계 회사를 다닐 수 있게 해 준 비결이 아닐까 생각한다. 



돌아와서 영어 문법의 경우 수학의 정석과 동급이었던 ‘성문 영어’와 ‘맨투맨’ 영어책을 달달 외웠다. 문법은 내용을 이해하면서 진도를 나가기에는 기본이 부족했기 때문에 선택한 방법이었다.


1 형식부터 수동태, 관계사 등에 이르기까지 연습장에 적고 외우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문장을 끊어가면서 해석하고 해석이 되지 않거나 문장의 구조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은 통째로 외웠다.


맨투맨 책의 겉표지 재질만 기억이 난다. 까슬 까슬했던 느낌.


수학은 더 가관이었다.


아예 중학교 진도를 따라가지를 못했다. 내 선택은 초등학교 수학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1, 2학년은 너무 쉬웠기에 3학년 수학책부터 시작해서 공식을 외웠다. 남들이 보면 뭐 하는 짓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삼각형, 사각형 밑변의 길이도 못 구하는데 루트와 근의 공식을 어떻게 배우겠는가.


하지만 수학은 도저히 임계점을 넘지는 못했다. 그래서 교과서와 ‘개념 원리’라는 책의 문제들 위주로 접근했고, 시험에 나올만한 문제들을 공략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래도 시험에서 모르는 문제가 나오면 그때는 내 찍기 실력을 믿기로 했다. 방법이 없었다.


바이블이라고 불렸던 교재들


점수가 낮을 것이 뻔한 수학을 빼고서 내가 성적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은 나머지 과목에서 고득점을 받는 것이었다. 특히, 한문, 사회 등 암기를 통해서 고득점을 받을 수 있는 과목을 잘할 수 있는 비결은 단 하나였고, 자신 있었다.


무조건적인 암기와 반복.


여기서 한 가지 여쭤보겠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본인이 최대 몇 시간까지 안 잘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아니, 하루에 몇 시간을 자면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으신가.


수학은 벼락치기가 불가능한 과목인 것을 이제 알았다.


보통 중학교 중간고사, 기말고사는 약 일주일 정도 진행된다. 그럼 그전 2~3주 정도는 시험 준비를 하는 시기이다. 지금은 1학년 때 시험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는데, 잘은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는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쳐야 했다.


내 경우 시험 일주일 전부터 잠을 거의 자지 않았다. 모든 과목을 외우겠다는 마음으로 임했고, 시험을 치르는 기간에는 시험 과목만 치고 나면 종례를 했기 때문에 시험이 끝나고 친구 집에서 한 시간 정도를 잔 뒤 또 밤을 새웠다.


이런 평온한 얼굴 표정은 아니었다.


도저히 잠이 올 때는 대야에 얼음물을 받아서 발을 담그고 공부를 했다.


그런데 탈이 났다.


중학교 2학년 때로 기억하는데, 어김없이 졸린 것을 참기 위해서 얼음물을 받아와서 발을 담그고 공부하던 중 갑자기 무언가 이상이 느껴졌다.


양쪽 다리 종아리에 심각한 통증이 찾아온 것이었다. 쥐가 나면 종아리가 단단해지듯이 종아리가 수축되었고, 거의 끊어질 듯한 느낌이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나는 소리를 질렀고, 새벽에 방에서 잠을 주무시고 계시던 아버지가 놀라서 밖으로 나오셨다. 그리고는 동동 구르는 나를 보고 놀라서 무슨 일이냐고 물으셨다.


나는 자초지종을 얘기했고, 너무 아픈 나머지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는 화장실로 가 뜨거운 물을 받아오셨고, 그 물에 내 다리를 담그고 2~3시간 정도 마사지를 해주셨다. 하지만 그렇게 마사지를 했음에도 종아리의 알이 풀리지 않았다.


그 당시 풀리오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서 아버지는 나를 차에 태우고 읍내 병원으로 향했다. 우리 집은 집성촌이라는 시골에 살았기 때문에 병원에 가려면 20분 이상 차를 타야 했다. 그러나 새벽녘에 응급실을 하는 병원은 내가 살던 고향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임시방편으로 아픈 다리를 이끌고 목욕탕으로 향했다. 다행히 내가 병원에 간 시간이 새벽 다섯 시경이었기 때문에 열린 목욕탕이 있었고, 온탕과 열탕에서 연신 다리를 주물러댔다. 그러기를 30분~1시간 정도 지났을까. 서서히 뭉쳤던 근육이 풀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웃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


큰 문제라도 있는지 알고 걱정했던 나와 아버지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고, 모든 근육을 풀고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지금은 훈장처럼 이야기하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로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고통이었다.


나는 이런 일을 겪을 정도로 내 몸을 갈아 넣었다. 육상 선수를 할 때 기른 악으로 깡이었을까. 아니면 무모함이었을까.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공부를 잘해서 부모님께 우수한 성적표를 보여 드리고 싶었을 것이다.


중학교 1학년 때 ‘미’, ‘양’, ‘가’로 도배되었던 내 성적표는 3학년 2학기가 되어 모두 ‘수’로 바뀌어 있었다. 하물며 수학도 ‘수’를 맞았다. 전체 2등이었다.*


*그 당시 성적표는 ‘수’, ‘우’, ‘미’, ‘양’, ‘가’로 성적을 매겼다. 미, 양, 가로 갈수록 성적이 좋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는 지금으로 따지면 1등급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전현무보다 공부를 잘했다.


결국 나는 전교 4등으로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관내에서 가장 유명한 명문 고등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다. 자랑을 좀 하자면, 우리 학교에서 그 학교로 진학한 학생은 나를 포함 총 4명뿐이었다.


내신 점수는 300점 만점에 288점이었다. 물론 내가 진학한 학교에서는 나에게 재학생 성적과 비교했을 때 내 성적이 조금 부족하다는 전화를 했지만, 나에게는 넘치다 못해 흘러내릴 정도의 성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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