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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쿡 Aug 01. 2024

공부하러 간 명문고에서 축구에 미치다.

촉망받던 육상 선수, S대를 꿈꾸다. (2)



고등학교계의 호그와트


내가 나온 고등학교는 마치 해리포터에 나오는 호그와트를 연상시켰다. 동네와 동떨어진 곳에 완벽히 공부만을 위한 학교를 지은 것이었다. 위치뿐만 아니라 외관도 하늘 다리부터 경사진 곳에 있는 기숙사까지. 공부를 위한 최적의 환경을 제공했다.


그곳에서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서 공부했다.


가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축구를 했다.


우리 학교는 꽤 유명한 축구부가 있었고, 그런 축구부를 위한 임시 운동장과 정식 운동장 2개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학생들에겐 축구하기 최적의 환경이었다.


이 정도면 거의 체육 고등학교와 다름없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육상 선수 출신이었기에 누구보다 달리기와 체력에 자신이 있었던 나는 점심시간, 저녁 시간, 주말 할 것 없이 운동장에서 축구를 했다.


사실 나에겐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선수 생활을 그만두고 공부로 전향했지만, 마음 한편에는 운동으로 성공하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다. 그리고 축구는 내가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스포츠였다. ‘박지성’ 선수가 영국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 시절 남자들의 단잠을 뺏어갔던 해버지


중학교에서 축구를 곧잘 한다는 소리를 들었고, 내가 팀을 만들어서 도장 깨기를 다닐 정도로 열정적이었기에 왠지 고등학교 진학 후 축구를 잘하는 모습을 보이면 학교 축구부에 스카우트가 될 것만 같았다.


진짜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망상인데, 그때는 그랬다. 집에 와서도 도로변에 차가 지나다니면서 나를 볼 수 있는 곳에서 리프팅 연습을 했다. 혹시나 우연히 축구 관계자가 차를 타고 가다 나를 봐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이런 모습으로 비치길 원했다.


머리는 삭발한 까까머리에 축구를 많이 해서 검게 그을린 얼굴, 거기에 롱패딩까지. 누가 봐도 운동부로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


입학 후 처음 맞이하는 토요일 영어 시간에 수업을 듣다 궁금증이 생긴 나는 선생님께 질문을 했다.


그리고 돌아왔던 답변.


“너 축구부 아니었냐?”


‘저 전교 4등으로 여기 입학했는데요…’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당시 우리 학교 축구부는 경기를 지면 머리를 밀던 풍습(?)이 있었다.


어쨌든 공부와 축구를 병행했던 나는 집이 멀었기 때문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우리 학교 기숙사는 시스템상 2주에 한 번씩 외박을 나갔다.


그러면 나는 쇼핑백에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집성촌으로 향해야 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태우러 자주 오셨고, 같이 진학한 시골 촌놈들의 부모님들이 카풀을 해서 한 분씩 번갈아 가면서 아들들을 태우러 오셨다.


하지만 이 편안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순간 아버지는 나를 태우러 오지 않으셨고, 남자답게(?) 별 느낌이 없었던 나는 그냥 짐을 싸 들고 고향을 왔다 갔다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매번 태우러 오실 때마다 축구를 하고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차에 타는 나를 굉장히 못마땅하게 여기셨다고 한다. 해야 할 시기에 해야 하는 일을 하지 않는 아들이 얼마나 원망스러우셨을지 지금은 100% 이해한다.


요런 걸 기숙사 가방이라 불렀는데, 타포린 가방이라는 근사한 이름이 있다.


공부는 중학교에서 벼락치기와 밤샘, 냉수마찰로 성적을 올려 보았기에 똑같이 하면 성적이 잘 나올 거라고 자만했다. 우연히도 고1 때는 내신과 모의고사 성적 모두 우수했고, 한 달에 한 번 치던 모의고사에서는 2등을 하기도 했다. 그랬기 때문에 더더욱 공부보다는 축구에 몰두했다.


친구들도 나를 좋아했다. 축구도 잘하고, 기숙사에서 말괄량이처럼 뛰어놀면서 공부까지 잘하니, 신기하면서도 함께 하고픈 친구였을 것이다.


선재 업고 튀어? 그냥 튀어다.


지금은 큰일이 날 수도 있는 제도이긴 한데, 그 당시 우리 학교에는 SKY 반이 있었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을 모아서 독서실처럼 학습 공간을 제공해 주고, 시험도 치게 해주는 그런 우수 반이었다.


한 반에 적게는 1명에서 많게는 3~4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소수 정예 그룹이었고, 선배 중에서도 SKY 반 출신 선배들은 좋은 대학교로 진학하는 케이스가 많았다.


그뿐만인가.


무리에 속하면 학교에서 엘리트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소속감을 원하는 만큼 느낄 수 있었다. 또, 독서실에는 1,000만 원짜리 공기청정기도 있었다.


당연히 인정욕구가 강했던 나는 오기를 부리며 그 반에 겨우 들어갔고 스스로를 대견해하며 우쭐했다. 앞날은 생각하지도 못한 채.


찾아보니 지금도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게 축구로 한 학년을 보낸 후 2학년부터 갑자기 성적이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담임 선생님은 내 성적이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다고 하셨다.


기본이 부족한 상태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경쟁하는 명문고로 왔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아니, 기본기를 채우기 위해서 1학년을 통째로 투자해도 모자랄 마당에 축구에 모든 것을 쏟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내신 점수가 바닥을 치면서 모의고사 점수까지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 번 정상에 올라서면 다음엔 내려가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처럼 내 점수는 끝없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점점 1등급, 2등급이 없어지기 시작하면서 급기야 수학은 손도 못 대는 상황에 직면했다. 모의고사나 내신 시험을 치면 1번부터 4번까지를 풀고 나면 거의 모든 문제를 찍어야 하는 상황에 부닥쳤다.


이랬던 수포자가 지금은 데이터 분석을 하고 있다.


심시간 식사를 하러 기숙사로 올라갈 때면 나를 보고 항상 응원해 주셨던 교장 선생님은 더 이상 나를 쳐다보시지 않았다. 오히려 성적이 크게 떨어졌다면서 핀잔을 주시는 분으로 변해 있었다.


SKY 반에서도 퇴출되었다. 더 이상 그런 엘리트 집단에 내가 있을 자리는 없었고, 나는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해, 내 고향에서는 친구들이 일탈을 하기 시작했다.


2주에 한 번 집에 갔던 나는 집으로 곧장 들어가지 않고, 친구 집에서 자며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것들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그렇게 나는 점점 더 공부와 담을 쌓기 시작했다.


이런 일탈이면 차라리 좋았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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