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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쿡 Aug 11. 2024

감투, 명예, 과시의 대학교 생활

S대 입학 전 10년간의 방황 (1)



우리 집 남자들은 유전적으로(?) 감투를 좋아했다. 


아버지는 지금 마을 이장과 군 연합회 회장을 역임하고 있고, 우리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이장하시기 전 마을 이장이셨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고, 초등학교부터 반장, 부반장을 독식했었다. 반장, 부반장이 안 되면 서기라도 하던 놈이었다.



이런 나에게 대학교는 꿈의 무대였다. 마치 K리그 선수가 영국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하는 것과 같았다.


대학교 1학년 입학 후 바로 부 과대표를 역임했고, 로타랙트라는 봉사 동아리의 부회장을 맡았다. 너무 부회장만 하긴 했는데, 내 스타일상 일인자를 뒤에서 돕는 것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이런 나를 총학생회 후보로 출마하는 한 선배가 눈여겨보았고, 총학생회장이 되면 내가 사회부 차장 자리에 앉는 조건으로 ‘구호대’에 들어갔다.*


*구호대를 잘 모르실 텐데, 지금으로 따지자면 선거 유세를 할 때 바람잡이처럼 앞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말 그대로 '구호대'이다. 구호를 외치면서 앞장서는 사람들이다.


이런 춤추는 분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구호대의 주요 역할은 선거 유세 구역에 모여서 구호를 외치면서 선거 유세를 하고, 당시 유행하던 노래와 춤을 연습해서 춤을 추는 역할이었다. 지나가는 학생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한 하나의 장치였다.


요런 학생 선거 운동 위원의 역할이었다.


약 20명 정도의 학생이 각 과를 대표해서 모였고, 모두 활동적이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구호대 활동에 임했다.


특히나, 나를 포함해서 남학생 5명은 2PM의 ‘Heart Beat’를 3일간 밤새워서 연습했고, 이날부터 우리 구호대는 학교의 유명 인사가 되었다.


지금 생각하니 이걸 어떻게 아무렇지 않은 듯 췄을까 싶다.


당시 그 곡은 어려운 안무와 칼군무로 화제를 모으고 있었는데, 그것을 학교 유세 현장에서 보여준 것이었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홍진영의 ‘사랑의 배터리’, 유명한 응원곡인 ‘질풍가도’, 백지영의 ‘내 귀에 캔디’ 등 유명하다는 노래는 모두 안무를 연습했다.


반대편에서 다른 구호대가 춤을 추고 있노라면 우리 구호대는 앰프를 틀고서 기싸움이라도 하듯이 경쟁했다. 누가 더 잘 노나, 누가 더 잘 추나 내기라도 하듯이 매진했다.


최근에는 이렇게 유튜브로 선거 유세를 한다.


당시 우리 총학생회장 후보는 본인을 도울 부회장 후보와 각 과 대표를 모았는데, 경쟁 후보와 비교하면 조금 약하다는 평이 많았다. 각 단과대학에서 힘깨나 쓰는 사람들을 모았지만, 경쟁 후보가 더 쟁쟁한 사람들을 모았기 때문이었다.


반전이 필요했다.


총학생회장 선거 전 후보가 모두 모여 대강당에서 선거 유세를 하는 당일, 양복을 차려입은 우리는 1,000여 명이 넘는 학생들 앞에서 ‘Heart Beat’를 췄고, ‘내 귀에 캔디’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우리 구호대에는 학교 대표 댄스 동아리 친구도 있었기 때문에 브레이킹 댄스까지 들어간 상태였다.


결과는 선거 유세 대승리.


나는 그날 스타가 되었고, 사인을 해달라는 요구를 받을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내 감투 병과 명예욕은 이때를 기점으로 하늘을 뚫었던 것 같다.


치어리딩 동아리는 아니었으나, 맘만은 치어리더였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이 단과대학 가요제였다.


나는 온통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있었는데, 당시 좋아하던 여학우가 있었다. 그 학우도 나와 같은 구호대에서 일하고 있던 학생이었다.


사적인 감정이 무르익을 즈음 단과대학 가요제 참가자를 뽑는 공고가 올라왔다.


주변에서 나가보라는 권유를 했지만, 자신이 없었던 나는 완곡히 거절했었는데 당시 학회장 선배가 내 이름을 그냥 집어넣고 말았다. 하지 않겠다고 말하니 엄청 무서운 표정과 태도로 다시 되돌릴 수 없다고 말했고, 주눅이 든 나는 알겠다고 답하고 말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총학생회 유세전에서 천 명이 넘는 학생들 앞에서 춤도 췄는데, 그깟 게 대수겠느냐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자신감에 절어있었던 것이었다.


친한 고등학교 친구 놈이 같은 과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 친구가 노래를 잘했다. 그래서 나는 친구에게 같이 나가자고 권유했고, 확답을 얻어냈다.


이후 주 3회 이상 노래방에서 노래 연습을 했다. 노래 제목은 버블 시스터즈의 '바보처럼'이었다.


가요제 당일, 친구와 함께 무대에 오른 나는 최선을 다해서 열창했다.


그리고... 그 여학우에게 고백했다. 약 1,000명의 사회과학대학 학우들 앞에서 말이다. 친구가 뒤에서 케이크를 들고 나왔고, 사회자와 관객들을 '불어라!'를 연신 외쳐댔다.


아무리 찾아도 가요제에서 고백한 이미지가 안 나온다. 나 같은 놈이 없나 보다.


하지만, 그 친구는 끝까지 초를 불지 않았고 사회자가 다음 참가자가 있으니 빨리 끄고 내려가자고 타일러서 겨우 불을 껐다. 그리고 사회자는 내려가서 두 분이 이야기로 풀어보라는 말을 남기고 우리를 퇴장시켰다.

최악의 고백과 함께 거둔 최악의 거절이었다.


가요제가 모두 끝나고, 참담한 마음으로 있던 나에게 전화가 왔다. 우리 총학생회장 후보였다. 그 선배는 덩치가 진짜 산만 했는데, 믿거나 말거나 체대 2명을 양손에 잡고 던진 이력이 있는 선배였다.


'아, 오늘 얻어터지겠구나.'는 생각을 했다.


차에 탄 나는 어디론가 끌려갔는데, 다행히 "좋아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우리가 선거를 앞두고 있으니 주의하자."는 말을 듣고 끝났다.


고백받으면 다 좋은지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고백을 거절당한 것도 서러운데, 혼나기까지 하다니. 거기에 대표란 대표는 다 하고 있어서 지인들이 너무 많았다. 다음날부터 수업을 들으러 나가기가 너무 겁이 났다.


이후 나는 3일간 밥도 안 먹고 칩거에 들어갔다. 그리고 3일 만에 무려 7kg 감량에 성공했다. 다이어트가 이렇게 쉬운 것이었나?


왜 그때는 인생은 이름대로 가고, 노래는 노랫말대로 흘러간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정말 '바보처럼'이었다.*


*안타깝게도 그 친구는 구호대에 있던 다른 과 친구와 사귀었다. 나는 내 감정을 숨긴 채 그 둘에게 아무렇지 않은 듯 다가갔다. 그런 나를 다른 구호대 친구들은 차마 볼 수 없었고, 매일 밥과 술을 사주었다.


맞다. 내 인생 전체에 제일 큰 위기였다.


내 인생에서 감투와 술은 또 빠질 수 없는 안줏거리 중 하나다.


입학 전 오리엔테이션부터 술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는데, OT 마지막 날 필름이 끊긴 나는 소주병을 주머니에 넣은 채로 먼저 복귀하는 버스 차량에 탑승해 버렸다. 버스가 출발했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를 발견한 버스 기사님이 다시 차를 돌려 OT 장소로 돌아가 내려주셨다.


당연히 과는 난리가 난 상태였다. 사람이 한 명 없어진 것이었으니까. 


찾다 찾다 못 찾은 과 집행부와 어린 대학교 1학년 새내기들은 한 방에 모여 걱정 아닌 걱정을 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버스 기사님을 통해 이 소식을 접한 집행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나는 OT부터 인기스타가 되었다. 


모두가 모여있는 방에 도착한 나를 본 선배들은 별 미친놈을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껄껄 웃었고, 1학년 친구들은 슬슬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똥 밟을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4년 내내 이 이야기는 안줏거리로 오르락내리락했다.



감투를 쓴 이후에는 술 먹는 빈도와 양이 더 많아졌다. 정치인들이 술자리가 많듯 직책을 맡게 되면 술을 마실 일이 많아진다. 1년 365일 중 370일은 술을 마셨다. 학생회 친구들과 마시고, 과 친구들과 마시고, 과 선배들과 마셨다.


어느 정도였냐면, 술을 자주 먹다 보니 돈이 없어서 과 친구 2명과 함께 살면서 햇반에 고추장을 비벼 먹었다. 그리고 한 명이 용돈을 받으면 그걸로 다시 술을 마셨다.


학생회에 들어간 뒤에는 더 심해졌다. 다 같이 모여서 동고동락하는 수준이었는데, 한 8명 정도가 함께 지냈고, 돈이 있는 애들이 계란을 한 판씩 사 왔다. 그러면 그걸로 간장 계란밥을 해서 매일 먹었다. 당연히 저녁에는 술이었다.


그냥 진짜 대충 끼니가 떼우기 위한 비빔밥이었다.


우리 학교는 외곽에 있고 시내와는 떨어져 있어서 학교 주변을 동그랗게 상권이 감싸고 있는 형태였다. 이런 외딴곳에 가게는 많이 없었고, 나는 거의 모든 가게에 단골이 되었다. 심지어는 술집에서 알바를 하기도 했다. 알바를 하다 친구들이 오면 술을 마시고, 또 일을 하기도 했다.


감투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사장님들이 더 잘 챙겨준 부분도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술집에 들를 때면 꽤 많은 인원이 동석하기도 했고, 우리가 있는 술집으로 학생회장이나 부장들이 방문하여 술값을 내주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작은 정치판이었다.


하지만 잠깐의 달콤함에 취해 방탕한 삶을 살고 있던 나에게 한 가지 시련이 닥쳤으니 ROTC, 학군단 합격 소식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학군단이 어떻게 굴러가는 조직인지 알지 못했고, 방학 때만 훈련을 다녀오면 전역할 수 있는 곳이라고 알고 있었다.


이는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었음은 학군단 합격 후 사전 오리엔테이션을 위해 합격생들과 선배들이 학군단에 모였던 그 순간 깨닫게 되었다.


그러게, 왜 선택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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