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대 입학 전 10년 간의 방황 (2)
그 당시 사귀었던 여자친구를 더 보고 싶은 마음에 나는 학군단, ROTC에 지원했다. 아버지에게 현역 병사로 간다고 했다가 매우 언짢으신 표정을 지으시는 것을 보고 더욱 마음을 굳혔다.
학군단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필기, 실기, 면접시험을 치러야 하는데, 나는 운동선수였기 때문에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중, 고등학교 때 다져진 벼락치기 능력과 찍기 신공으로 필기를 준비했다. 면접은 사실 실기까지 합격했다면 큰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최종적으로 ROTC에 합격했고, 이 선택이 내 인생에 터닝포인트가 될 줄은 그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합격 후 사전 오리엔테이션을 위해서 학군단에 모인 당일, 나는 전날 먹은 숙취로 정신이 없었다. 모자를 쓴 채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너털너털 학군단에 도착한 나는 시키는 대로 전투복과 단복 사이즈를 재고 간단한 설명을 듣고 집으로 복귀했다.
그런데, 학군단에 먼저 입단해 있던 과 선배가 나를 부르는 것이 아닌가.
이유는 이러했다.
거기 있었던 선배들이 나를 굉장히 안 좋게 보았고, 내가 ‘가 입단자’* 생활을 시작하기만을 벼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태도부터 복장까지 어느 하나 마음에 드는 부분이 없었음은 안 봐도 비디오였다.
*아직 입단하지 않은 자들을 일컬어 ‘가 입단자’라고 불렀다.
알고 보니 우리 학군단은 전국에서 악, 폐습으로 매우 유명한 학교였고, 훈련소에서 악, 폐습 설문조사를 하면 50개 중에 50개가 나오는 학교였다. 이런 중요한 사실을 친하다고 생각했던 우리 과 학군단 선배들이 나에게 일절 말 한마디를 안 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9시~10시경 학군단에 입단한 우리 동기들은 한 강의실로 모였고, 그렇게 지옥 같은 ROTC 생활이 시작되었다.
집합 장소에서 우리는 책상에 앉아 다리를 붙이고 차렷 자세로 대기하고 있어야 했는데, 불행하게도 오다리 때문에 다리가 붙지 않는 동기가 있었다.
강의실에 온 한 선배가 “왜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냐.”라고 물었고, “오다리라서 그렇습니다.”라는 대답을 하자, “오 다리면 어쩌라고.”라면서 앉아있던 동기를 넘어뜨렸다.*
*알고 보니 그 선배는 창원시 유도 대표였다. 하지만 그 선배가 간과한 사실이 있는데, 그날 선배가 넘어뜨린 그 친구는 키 184cm에 태권도 4단, 체대 과대표였다. 힘으로는 아무도 이길 수 없던 친구였다. 솔직히 지금이었으면, 참지 않았을 것 같다.
같이 모인 동기들과 함께 선배님(?)들의 관심 속에서 신나게 한바탕 몸의 대화를 나눈 후 학군단 1년 차를 통솔할 임시 중대장을 뽑는 차례가 왔다. 입단 전이긴 했으나, 동기들을 관리할 관리자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하필이면 우리 과 선배 2명이 학군단에서 꽤나 인지도도 높고, 신뢰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던 터라 안타깝게도 내가 임시 중대장이 되었다. 여기에는 내가 보였던 껄렁한 태도도 한 몫했다. 아마 날 죽이기 위해서 내가 임시 중대장이 되길 바랐을 것이다.
감투를 진짜 좋아하던 나였지만, 이 감투만큼은 사양하고 싶었다.
이 당시에는 스마트폰이 없었다. 그래서 문자로밖에 연락이 되지 않았는데, 선배들이 인터넷 카페에 공지사항을 남기면 10분 안에 모든 인원이 댓글을 달아야 했다. 뿐만 아니라 10분 안에 집합하라고 하면 모든 인원이 10분 안에 집합 장소로 나가야 했다.
이 모든 것을 전화와 문자로 해결해야만 했다. 마치 릴레이 달리기와 같았다. 만약 10분 안에 모이지 못하거나 댓글을 달지 못하면?
집합이었다.
새벽 3시면 어학원 강의실에 어김없이 모였고, 신나게 매타작이 끝나면 새벽 4시에서 5시가 되었다. 그리고선 오전 6시에 있는 체력단련 시간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모두 참석했다.
입단 전 우리는 군인이 되기 위한 과정이라는 핑계로 숱한 고난과 시련을 겪었는데,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것이 단복을 다리고, 등에 삼선을 새기는 일이었다.
일단 단복을 다리는 방법이 적힌 A4 용지를 받았다. 그리고 두루마리 휴지를 3개를 놓고 그 위에 아크릴판을 올린 후 받은 A4용지를 올렸다. 마지막으로 올려져 있는 A4 용지 위에 빈 용지를 한 장 올리고 두루마리 휴지 사이에 스탠드를 넣어서 불빛을 비추면 글자가 비쳤다.
그럼 그냥 그때부터 40장씩 쓰면 되는 일이었다. 한 장 당 1시간 이상 걸렸으니, 한 번 깜지 명령을 받으면 40시간을 쓰면 되는 간단한 과제였다.*
*입단 전 축하(?)의 의미로 얼차려를 받았는데, 이때 우리가 쓴 깜지를 불쏘시개로 쓰면서 태우는 행사를 했다. 수 백 혹은 수천 장이 활활 타올랐다. 전통이라는데, 아무도 웃지 않았다.
이게 첫 번째 단복 손질의 관문이었다. 물론 집합 대신에 시키기도 했다.
이어서 선배가 단복에 새겨진 삼선의 간격을 자로 쟀을 때 매뉴얼과 0.5mm라도 오차가 있을 경우 그 단복은 어김없이 동그랗게 말려 구겨졌다. 처음부터 다시 하라는 이야기였다.
절대 주름이 져서는 안 되는 게 단복 규칙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돌아가 주름을 다 일일이 펴야 했고, 다시 검사를 받아야 했다.
옷걸이에 단복이 닿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항상 간격을 두고 와이셔츠를 걸어두었다. 그리고 같이 단복을 다리다 서로 본인 단복을 건드리지 말라고 싸울 정도로 예민해졌었다.
그 당시 우리의 별명이 무엇인지 아는가?
'유령'이었다. 흰색 단복 와이셔츠를 옷걸이에 걸고서 새벽마다 캄캄한 골목을 뛰어다니는 모습이 꼭 유령 같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더 비참했던 것은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쳤던 것이었다.
입단하기 전에는 혹여나 선배를 마주치거나 멀리서 선배가 보이면 뛰어가서 “안녕하십니까! 가입단자 000입니다.”를 꼭 해야만 했다.
입단 후에는 100m든, 200m든, 2층이든, 3층이든 선배가 보이면 무조건 “충성”이라고 크게 경례를 해야만 했다. 사주경계를 한다는 명목이었다.
문제는 소리가 너무 크다 보니 앞에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거나, 함께 있던 친구나 선배들이 나를 부끄러워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나는 부끄럽지 않았다. 살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생활들을 거치면서 원래도 적었던 우리 동기들 중 6명 정도가 ROTC 포기를 선언했고, 19명이라는 소수 정예로 학군단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첫 동계 훈련을 받으러 간 성남종합군사학교에서 나는 같이 모인 수많은 동기들을 통해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ROTC도 군대를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2년 6개월이나.
그제껏 방학 때 훈련만 가면 전역을 하는 줄 알고 있었던 나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경험했다. 이럴 거면 병사로 갔지, 왜 장교를 선택했냐는 후회가 몰려들었다.
어떡하나, 그동안 매 맞으면서 버틴 게 얼만데. 그냥 참고 버티기로 했다.
그때 그만두었어야 했다.
첫 동계훈련에서 우리는 109개 학군단 중에 107등을 했다. 뒤에서 두 번째였다.
지금까지가 게임에서 일반 난이도였다면, 이제부터는 헬 난이도가 펼쳐질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