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디터쿡 Aug 04. 2024

처참한 수능 실패와 후회의 눈물

촉망받던 육상 선수, S대를 꿈꾸다. (3)




친구들을 따라 시작한 일탈은 생각보다 오래갔다. 아니 졸업할 때까지 갔던 것 같다. 공개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시절 무렵부터 술에 입을 대기 시작했다. 공부와 축구만 알던 나는 새로운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호기심에 시작했던 음주는 2주에 한 번 내 취미가 되었다.


술과 관련해서는 고등학교부터 에피소드가 많다. 지금은 추억이라고 하지만 정말 철없는 행동이었고 매우 반성하고 있다.


고 2 어느 날 중간고사였는지, 기말고사였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내신 시험을 보고 일찍 마쳐서 기숙사로 돌아온 나는 어김없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마침 그 시간대에 지역 축제가 열리고 있었는데, 축제에서 나오는 음악 소리가 학교까지 들렸다.


이런 지역 축제를 생각하면 된다.


장난스럽게 비트에 맞춰 춤을 추던 나는 갑자기 축제에 가고 싶어졌다. 즐길거리가 부족한 우리 학교에서 축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이었고, 이때가 아니면 언제 가겠냐는 생각이 내 뇌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 길로 친구들을 섭외하기 시작한 나는 나를 포함해서 약 8명을 모아 축제의 현장으로 향했다. 그룹 ‘빅뱅’의 스타일이 유행하던 때였고, 모히칸 스타일의 머리에 나이키 운동화를 신는 등 나름 멋을 한껏 부린 채로 당도했다.


당시 유행하던 빅뱅 '거짓말' 패션


축제를 둘러보던 우리는 막걸리와 파전, 똥집 등을 파는 축제 행사 가게에 보았고, 한껏 차려입어서 나름 성인처럼 보였던 내가 대표로 들어가 친구들을 들어오게 했다. 그리고 시작된 파티. 어른이 된 것처럼 들떠서는 술잔을 기울이던 차 갑자기 국어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그러시고서는 “재밌고 놀고, 맛있게 먹고 가.”라는 말을 남기신 채 나가셨다.


우리는 잘 넘어가서 정말 다행이라는 말로 걱정을 털어낸 채 그날 밤을 추억으로 물들였다.


다음날, 학교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자습을 하던 중 갑자기 방송이 나왔다.


“지금 호명하는 사람들은 교무실로 오도록 하세요. 000, 000, 000, 000…”


대충 방송을 흘려듣고 있던 우리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호명하는 이름이 매우 낯익었기 때문이었다. 나와 친구들의 이름이었고, 어제 축제에 갔던 명단인 것만 같았다.


지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같았다. 식은땀이 흘렀다.


의미를 깨달은 우리는 서로를 걱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교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국어 선생님의 말씀.


“먼저 맞을 사람”


약삭빨랐던 내 친구 한 놈이 먼저 엎드렸다. 먼저 맞아야 덜 맞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몇 대 맞을래?”


“10대 맞겠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10대를 맞게 되었고, 나는 두 번째로 엎드려 맞았다. 그리고 기르던 모히칸 머리는 그 자리에서 잘려 나갔다. 또다시 까까머리가 되었다.


난 아직도 어느 정도의 체벌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 같은 놈 때문에.


고 3이 된 나는 정신을 차리는 듯했으나, 그 기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우리 학교에는 기숙사로 올라가던 길에 양쪽에 모과나무가 열렸었다. 모과는 향이 좋아서 기숙사 학생들 중 몇몇은 모과를 따서 방에 두고 방향제로 쓰곤 했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모과가 방향제로 보이지 않았다.


모과를 여러 개 따서 기숙사 방으로 들어온 나는 잠시 모과를 방에 맡겨(?) 두고 마트로 향했다. 그리고 과실주용 소주와 큰 설탕 한 봉지를 사들고 돌아왔다.


과실주용 소주는 살 생각이 없었는데, 뭔가 타임캡슐처럼 친구들과 함께했던 고등학교의 추억을 남기고 싶었다.


방에 들어온 나는 친구들과 함께 모과를 썰었다. 그리고 모과와 설탕을 1:1 비율로 통에 담아서 모과청을 만들었다.


여기서 끝냈어야 했다.


감기에 걸린 친구들과 나를 위해 만든 천연 과일청이었다.


모과청을 맛본 친구들의 평이 좋자 남은 모과를 썰었고, 두 번째 통에는 모과와 과실주용 소주를 함께 넣었다. 모과주를 만든 것이었다.


만든 모과주를 중간에 두고 나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이거 수능 끝나고 마시자.”


그리고 정확히 수능 12일 전, 밀봉해 두었던 모과주를 땄다.


일탈이라고 하기에는 광기에 가까웠다.


이런 내가 성적이 좋았을 리가 없다. 나는 수포자로 거듭나 있었기 때문에 수학을 안 보는 학교나 전형을 찾기 시작했고, 논술 전형이 가능한 학교를 찾았다.


언어, 수리, 외국어를 합쳐 5등급이 되면 갈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성적이 오락가락했지만, 언어 1등급, 수리 3등급, 외국어 1등급을 맞을 때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렇게 놀고서도 꽤 성적은 좋았다. 아니면 내 기억이 왜곡된 것일까.


논술을 제법 잘했던 나는 사설 논술 시험을 치면 장원을 하기도 했어서 논술 전형으로 대학 입학이 가능하다고 또다시 오판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진짜로 오판이다.


그렇게 수능 당일.


우연히도 우리 학교에서 수능을 보게 된 나는 기숙사에서 제공해 준 도시락을 챙겨서 시험 시간보다 2시간이나 먼저 학교로 향했다. 느낌이 좋았다.


시험 준비를 여유롭게 마쳤다고 생각했던 나는 시험 시작 5분 전에 수험표만 있고, 학생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두 번 남은 S대 영어 시험에도 신분증을 안 들고 갔다.


감독관님에게 이 사실을 말한 후 “학교가 여기”라고, “기숙사에 산다.”라고, “지금 다녀오면 가져올 수 있다.”라고 빌었고 승인을 받은 후 기숙사로 전속력으로 뛰어갔다.


기숙사에 도착해 닫힌 기숙사의 담을 넘어 학생증을 챙겨서 다시 교실에 들어온 나는 자리에 앉았고, 바로 시험이 시작되었다. 이후는 읽어 보지 않아도 뻔할 것이다.


그때의 나는 거의 파쿠르 선수에 빙의된 상태였다.


국어 듣기가 나오자마자 몸에서 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3년간 한 번도 안 틀렸던 국어 듣기를 수능 당일에 처음으로 틀렸다.


수학은 더 가관이었다. 1번부터 4번까지는 매번 풀었었는데, 그마저도 풀리지 않았다. 나는 2번까지만 풀고 모든 문제를 찍었다.*


*신기한 사실은 모든 문제를 거의 다 찍었는데, 4등급을 맞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외국어 시간에는 심지어 처음으로 졸기까지 했다. 수업시간에도 한 번도 자본 적이 없었는데, 수능 때 잠이 오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제2 외국어 시간에는 감독관 두 명이 수다를 떨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에는 진짜 고발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냥 내가 시험을 못 봤던 것 같다.


언, 수, 외에서 각각 1, 3, 1 등급을 원했던 나는 고등학교 생활을 통틀어 가장 낮은 점수를 수능에서 받아 들었다. 모든 과목에서 2~3 등급 이상씩 떨어진 것이었다.


성적표를 받아 든 나는 부모님과 진학할 학교 얘기를 하다 그만 펑펑 울고 말았다. 내가 했던 무책임한 행동에 대한 후회였고, 하지만 내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함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나를 보고 부모님은 “왜 우냐”라고 다그치셨다.


“너무 후회가 된다.”라고, "내가 처한 현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라고 답한 나는 대성통곡을 했다.


갈 수 있는 학교가 많이 없었다. 


마침 여동생은 S 대는 간당간당한데, K대 혹은 Y대를 갈 수 있는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동생을 위한다는 핑계로 내 점수보다 한참 하향지원하여 지방에 있는 한 국립대를 선택했고, 당당히(?) 장학금을 받고 대학교에 입학했다.*

                     

*이 기회를 빌어서 마음 고생하셨을 부모님께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기숙사비까지 내주시면서 보낸 학교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음주를 한다는 사실을 숨기고 철없는 행동을 반복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