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길이 닿으면 어김없이 검은 줄기로 굳어져가며, 그 줄기를 타고 잎은 곧 갈색을 띄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갔다. 그렇게 몇몇의 식물을 내 손에서 떠나보냈다.
이런 경험을 말미암아 나라는 사람은 누군가를 보살피거나 기르면 안되는 사람이라고 쉬이 결론을 내려 버렸다.
그러다 다시금 살아있는 것과 지내는 삶이 그리워졌고, 다시 한번 잘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다신 무언가를 키우지 않으리라는 결심은 쉬이 무너졌다.
엄마와 함께 화원을 찾았다.
돌보기 힘들지 않고, 밖에서도 잘 자라는 식물이 있나요? 저 같은 사람도 키우기 쉬운 식물은 뭘까요. 추천받은 식물들을 집으로 들였다. 나비 수국과 오렌지 자스민.
결국 적막한 공간의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나를 위해, 내가 살기 위해
그들이 본래 있어야할 곳에서 내 공간으로 옮겨왔다.
(진짜 그들이 있어야할 곳은 어딜까. 얼마나 멀리 데리고 온 걸까.)
11월 추워지기 전까지 초록 잎들은 생기를 유지했고 꽃은 피고 지고를 반복하며 향까지 뿜어내며 내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베란다 햇빛이 잘 드는 공간에 내어두었다가 흙이 마르면 한번씩 물을 챙겨주고 내가 바빠지면 잠시 그 존재를 잊기도 했다가 베란다 문을 무심코 열였을 때 활짝 핀 꽃을 보면 문득 그 존재를 알아차리기도 했다.
그렇게 또 쉬이 계절이 바뀌면서 추위가 시작됐다. 추위를 피해 실내 공간으로 옮겨두니 햇빛이 부족했던 탓인지 건조한 공기 탓인지 점점 시들어갔다. 덜컥 겁이 났다. 이렇게 또 식물을 떠나보내야하는 건 아닌가 하고.
며칠동안 계속 되는 흐린 날에 안절부절하며, 햇볕이 가장 잘 드는 창가를 찾아 옮겨가며 안간힘을 다해 살려보려고 애를 썼지만 축 쳐진 잎을 다시 살리는 일은 어려워보였다.
가망이 없는 건가 했을 때, 며칠이 지난 어느날 퇴근해서 집에 돌아와서 보니 초록 빛을 띈 잎들이 다시 돋아나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의 그 기분이란.
정말 대견하다. 나는 속으로 울었다.
그리고 이 기쁨을 어느 누가 됐든 꼭 나누고 싶었다. 아니, 자랑을 꼭 해야만 했다. 첫 번째로, 적막함을 토로하자 제일 먼저 식물을 권했던 엄마에게 사진 몇 장과 함께 소식을 전했다. 엄마는 나와 같은 레벨로 기쁨을 표했다. 그리고 오랜 친구들과의 단톡방에 사진 몇 장과 시든 잎이 새로 돋기 시작했다고 소식을 전했는데, 한 친구가 이런 답을 해주었다.
“식물들은 크게 앓고나서 버티면 꽃을 피운대”
식물에 대한 기초가 없던 나는 또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됐고, 이 말 참 아름답다고 여겼다. 이 문장을 계속 음미하며 되뇌였다.
앓고 버티다 버티다 다시 꽃을 피운 거였구나.
인간은 식물을 돌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식물이, 동물이 인간을 보살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식물을 돌보며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만들어 보라고 신이 인간에게 이런 시간을 부여한 것은 아닌가?
새순이 다시 돋아남으로 나를 위로해주는 기쁨이 이리 클 줄이야. 생각보다 그들의 생명력은 강하다는 걸 깨닫는다. 지금은 인간의 볼살핌을 받고 있는 식물일지언정 그들이 태초에 가지고 태어난 생명력이 보호자를 자청한 인간보다 더 강한 존재였던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잊고 지낸 혹은 모르고 지낸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스쳤다.
대견하다 나의, 우리의 식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