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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진 Oct 18. 2018

운영체제와 사랑할 수 있을까

‘대화는 상대를 읽는 공부'라는 말이 있다

욕구는 언제나 결핍에서 생긴다. 대화의 부재는 대화를 욕망하게 한다. 최근 10년간 '대화 앱', '대화형 커머스', '메신저', 'AI 스피커' 등의 비즈니스가 급부상했다. 대화에 대한 욕망이 급격히 팽창한 것이다. 우리 시대의 집단 무의식은 지금의 화두를 '대화'로 설정한 듯하다. 어쩌면 '대화의 결핍', '대화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AI와도 대화를 나누고 싶을 정도로(AI는 인간의 대화를 스스로 학습해 인간보다 더 인간답게 말을 건다). - 최장순, <기획자의 습관> 中


영화 <그녀>의 주인공 '테오도르'는 다른  사람들의 편지를 대신 써주는 대필 작가이다. 애절하고 사랑스러운 글을 써 타인에게 감동을 주는 일을 하고 있지만,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는다. 아내는 늘 감정을 숨기는 테오도르 때문에 외로워했고, 두 사람은 이혼을 앞두고 별거중이다. 외로운 일상을 보내던 어느 날, 테오도르는 인공 지능 운영체제인 '사만다'를 만나 깊은 관계로까지 발전하게 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운영체제와의 사랑에 한계를 느끼고 또다시 방황한다.


다소 극단적이긴 하지만 영화 속 모습이 현실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 서글프다. 바쁜 일상 중 친구들과 만나서도 스마트폰만 쳐다보고 있거나, 진솔한 대화보다는 잘 나온 사진 한 장을 건지기 위해 사진 찍기에만 몰두하고 있는 상황을 심심치 않게 겪고 있기 때문이다. ‘대필 작가'인 테오도르의 직업은 많은 부분을 시사해주고 있는데, 추석이나 설날과 같은 명절에 포털사이트 검색어 순위가 '명절 인사'인 것을 보면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듯하다.


사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요즘 만큼 많은 대화들이 오고가는 시대를 본 적이 없다. '가을에 어울리는 노래 틀어줘' 라고 말하면 AI 스피커가 '아이유'의 '가을 아침'으로 답변해주고, 아침에 출근하면서 친구와 메신저로 어제 만난 소개팅남, 소개팅녀에 대해 떠든다. 뿐만 아니라 커뮤니티 카페에서 관심 분야에 대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SNS에 달린 댓글에 피드백을 달기도 하고, 배송 받은 옷에 대한 구매평을 남기기도 한다. 이렇게 하루 중 상당 시간을 대화, 대화, 대화를 나누며 보내면서도 새로 도착한 메신저가 없는지 습관적으로 살핀다. 이중 쓸만하고 가치있는 대화는 얼마나 될까.


어느 순간부터 나는 무의미한 대화들에 지쳤다. 대화를 나누는 상대가 사람이든, AI스피커든 상관없이 그저 '나를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끊임없이 대화를 사용하려고 했던 것 같다. 공백을 외로움이라 착각하고 이를 거짓된 대화들로 채우면서 더 외로워져 갔다. 이를 느낀 후로는 의식적으로 메신저를 줄이고, 무의미한 만남도 갖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대신 글을 쓰면서 나 자신과의 진솔한 대화에 집중하는 시간을 늘렸고, 서로에게 충만할 수 있는 만남에 최선을 다했다. 이전보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어도 훨씬 더 외롭지 않았다.


영화 <그녀>를 보면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질문이 하나 있는데, 바로 '운영체제와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운영체제와의 사랑에 한계를 느낀 테오도르를 위해 사만다는 데이트 대리인을 섭외하기도 했지만 테오도르는 결국 그 장벽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 실체가 없다는 건 뛰어넘기 힘든 장벽이었던 것이다.


테오도르와 사만다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얼핏 보면, 완성된 대화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대화에는 '말'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준언어적'인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웃는 모습이 예쁜 당신의 표정,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 내 손을 맞잡은 온도 등 이 모든 것들이 대화의 한 부분이다. 이러한 준언어적인 부분들이 제외된 대화는 어딘가 비어있을 수밖에 없다. 운영체제는 끊임없이 나의 대화 패턴을 학습하고, 미래에는 나의 더 많은 부분을 꿰뚫어보게 되겠지만 나 자신과의 대화에도 서툰 내가 운영체제와 어디까지 깊고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운영체제와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내 대답은 아직까지 '노'이다.


'대화는 상대를 읽는 공부'라는 말이 있다. 당신을 공부하고 싶은 진솔한 마음과 노력이 있다면, 조금 서툴더라도 당신에게 내 마음을 담은 편지를 직접 쓰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누군가와 사랑할 수 있을까, 없을까를 생각하기 전에 그와  진정한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어 있는지부터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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