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레터
9년 만에 돌아온 픽사의 28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2>를 보고 왔습니다. 코로나 이후 영화관에 갈 일이 많지 않았는데, 전편을 워낙 재미있게 봐서 기대감을 갖고 한걸음에 영화관으로 달려갔어요.
<인사이드 아웃>은 주인공 '라일리'의 머릿속 감정 컨트롤 본부에 있는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이라는 다섯 감정들의 시점으로 라일리의 감정을 이야기하는 영화인데요. 이번 <인사이드 아웃2>는 라일리가 사춘기를 맞아 '불안', '당황', '따분', '부럽'이라는 새로운 감정들이 생겨나면서 일어나는 충돌을 다룹니다. 새롭게 생겨난 감정들 중에서도 이야기의 중심을 이끌어간 감정은, 바로 요상한 머리 스타일의 '불안'인데요.
불안이는 라일리가 하는 일들을 그르치는 주동자입니다. 언뜻보면 다른 감정들과 '불안'의 대립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불안이를 미워할 수 없는 이유는 불안이 또한 진심으로 라일리의 일이 잘 되기를 바란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 첫 발표를 맡은 전날 밤을 떠올려 볼까요? 친구들을 대표하여 발표를 맡게 되었다는 '기쁨'과 동시에, 발표를 망치면 안 된다는 '불안'에 휩싸였을 겁니다. 친구들 앞에서 멋지게 발표하는 모습을 떠올려 보지만, 자꾸만 발표를 망칠까 봐 걱정돼 잠을 설치고 맙니다. 다음 날, 잠을 못 자서인지 컨디션이 영 좋지 않고, 결국 발표 망친 뒤 무대에서 내려와 친구들 몰래 눈물을 훔칩니다.
어릴 땐 '불안'의 감정이 참 미웠던 것 같습니다. 불안해서 발표도 망치고, 시험도 망치고, 친구 관계도 엉망이 되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성인이 되고나서 나름 '불안'이라는 감정을 다루는 방법을 알게 된 뒤, 꼭 불안한 감정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것은 아니란 걸 배웠어요. 불안하니까 한 번 더 발표 연습을 하고, 불안하니까 잘 아는 문제도 한 번 더 복습하고, 불안하니까 친구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눔으로써 일이 더 좋은 쪽으로 잘 해결되곤 했으니까요. 오히려 '불안'의 정도가 너무 낮으면, 부족한 준비성으로 인해 일을 그르치기도 하더군요.
즉, 일을 잘 해내기 위해서는 '불안'의 감정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불안'이라는 감정을 적절하게 다루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인이 된 이후에도 불안의 감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특히 불안의 감정은 시도때도 없이 찾아오기도 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해일처럼 모든 감정을 휩쓸어 버리기도 해서, 저 역시도 불안의 감정에 한동안 짓눌리는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를 불안의 늪에서 꺼내준 건 글쓰기였습니다. 우리가 불안의 감정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비일관적이고 걷잡을 수 없이 갑작스럽게 커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요. 불안의 감정을 글로 써보면 사실 그리 큰 해일도, 돌풍도 아닌 겨우 두세 문장에 불과한 것이란 걸 알게 됩니다. '내가 겨우 이 두세 문장에 불과한 일 때문에 잠도 설치고 운 거야?'하며 손을 탈탈 털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힘을 갖게 해주죠.
만약 사춘기 시절에 글쓰기를 시작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작은 아쉬움이 있습니다. 까칠하고 예민했던 저는 꽤 고약한 사춘기를 보냈거든요. 하지만 그 시절의 제가 밉지는 않아요. 그런 흑역사 하나쯤 품고 사는 것, 그리 나쁘지만은 않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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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글레는 교육, HR, SaaS 등 다양한 분야를 거친 회사원이자 <나답게 쓰는 날들>,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 아무에게나 쓰다> 에세이를 2권 출간한 작가가 보내는 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에세이 레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