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레터
아무리 쥐어짜도 글이 안 써질 때 마지막으로 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한 강연에서 받은 질문입니다. 질문만 들어봐도, 이 분이 글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보았는지가 느껴졌어요. 저는 이 분께 글쓰기의 최후 수단으로 '책'을 추천해 드렸는데요. 그 이유는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책을 펼치면 99%의 확률로 좋은 글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제가 매주 여러분께 일글레를 보내드리기 위해선 무엇보다 '글감'이 필요한데요. 일상에서 발견한 특별한 사건들, 유튜브나 TV에서 인상 깊게 본 영상도 좋은 글감이 되지만, 글감을 찾는 데 가장 효과적인 건 뭐니 뭐니 해도 책입니다.
책은 인문, 과학, 철학, 심리, 연애, 예술, 음식, 경제, 경영, 투자 등 세상의 모든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끌리는 주제의 아무 책을 골라 잡으면, 거기에 한 작가의 몇 년 혹은 일생이 담긴 이야기가 압축되어 있어요. 제가 천 권이 넘는 책을 읽고 나서 깨달은 점은, 나와는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주제의 책 속에도 단 하나쯤은 내 인생과 관련이 있거나 도움이 되는 것이 반드시 있다는 것이었어요. 오히려 매번 관심 있게 보던 주제가 아닌 나와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한 주제의 책 속에서 생각지 못한 새로운 글감이 발견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작가의 관찰력은 의지의 문제이기에, 의지만 있다면 반드시 책 속에서 글감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99%의 확률로요.
둘째, 작가의 필체에 담긴 리듬을 타고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글쓰기가 도통 진도가 나가지 않는 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아예 시작조차 하기 어렵다면 시동을 걸어주는 트리거(trigger)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이를 테면, 아침에 침대에서 바로 일어나기 어려울 때 기상송 한 곡을 들으면 자리에서 일어날 힘이 생기는 것처럼 말이죠.
사람마다 각자 다른 모양의 지문이 있는 것처럼 작가마다 다른 필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번은 제 글이 한 매체에 노출이 되었는데, 우연히 제 글을 본 지인이 '어? 수진님이 쓴 글 같은데?'하고 읽다 보니 맨 하단에 제 이름이 쓰여 있더라고 하더라고요. 이처럼 누군가의 필체가 담긴 글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리듬에 올라타게 되고, 글을 쓰고 싶은 동력이 생길 수 있습니다. 유독 필체가 강하고 개성이 넘치는 작가 분들이 계시는데요. 본인에게 잘 맞는 리듬을 가진 분의 책을 최후의 수단으로 보유하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입니다.
셋째, 텍스트를 읽을 때 가장 깊이 있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버스에서 창밖을 보며 생각에 빠지기도 하고, 음악을 들으며 생각에 빠지기도 하고, 지인들과 이야기를 하며 다양한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요. 모두 단편적인 생각들이거나 금세 다른 생각으로 전환 돼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책을 읽을 땐 조금 다릅니다. 눈과 머리로 텍스트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상으로 빠져드는 기분이 들어요. 한 문장에 10분이 넘도록 갇혀 있기도 하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에 대해 마치 10년 넘게 연구를 해온 사람처럼 진지하게 문제를 탐구해 보기도 하죠.
좋은 글은 깊이 있는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하지만 직장 생활을 하고, 가정을 돌보는 사람들에게 깊이 있는 생각을 할 여유가 많지는 않죠. 그럴 때 최후의 수단이 바로 책입니다. 하루에 단 30분만이라도 책을 펼쳐 보세요. 23시간 30분 동안 경험해 보지 못했던 완전히 다른 차원의 깊이 있는 생각에 빠지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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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글레는 교육, HR, SaaS 등 다양한 분야를 거친 회사원이자 <나답게 쓰는 날들>,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 아무에게나 쓰다> 에세이를 2권 출간한 작가가 보내는 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에세이 레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