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는 배추 셀 때나 하는 말이 아니에요

[포기하기]

by 유수진

작가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포기하기]


아니다 싶은 일은 빠르게 포기하는 편입니다. 드럼 레슨 한 달, 보컬 레슨 한 달, 이렇게 한 달 단위로 배우다가 안 맞는다 싶으면 쿨하게 그만둬요. 마치 그만두려고 시작하는 사람 같기도 해요.


처음부터 포기를 잘 했던 건 아니에요. 어려서부터 '인내심'이 중요하다고 배워왔으니까요. 피아노 한 대와 의자 하나가 겨우 들어가는 피아노 학원 개인 연습실에서 한 곡을 열 번 칠 때까지 밖으로 못 나갔어요. 너무 지겨워서 창문 밖으로 선생님 얼굴을 바라보면 선생님이 계속 치라고 손가락 신호를 보냈어요. 어쩔 수 없이 우물 정(正)자를 두 개 다 만들고 나서야 연습실 밖으로 나와 "선생님, 다 했어요!"를 외치고 도망쳤습니다. 아직 우물 정 두 개를 다 만들지 못한 친구들은 나를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봤어요. 나는 학원 밖으로 나오며 무서운 생각을 했어요. 학원에 남은 친구들이 패배자라는 생각을요.


한동안 글쓰는 일이 두려웠어요. 글의 주제와 구조를 기획하고 열심히 쓰던 도중 꼭 중간에 막히는 거예요. 그럴 땐 기름이 똑 떨어진 차를 타고 고속도로 한 가운데 멈춘 사람 같았어요. 주제가 마음에 들어서 버리기는 아깝고, 지금까지 달려오느라 애쓴 시간도 아까워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거죠. 결국 '작성중' 상태로 두기로 했어요. 여기서 포기하면 정말로 글쓰기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 될 것 같았거든요. 작성중인 상태의 글이 몇 달, 몇 년째 작성중으로 남아있는 모습을 보고 번뜩 깨달았습니다. 지금 나는 작성중인 상태가 아니라 아무것도 쓰지 않는 포기 상태라는 것을요.


더 이상 작성중이라는 말로 사기치지 말고 포기를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먼훗날 쓸모가 생길 것 같아 버리지 못하겠으면 서랍 속 깊숙히 넣어두고 깔끔하게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처음 학교에 가는 초등학생처럼 새로운 마음으로 쓰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다 중간에 막히면 또 서랍에 넣고, 또 넣었어요. 서랍에 쓰다 만 글들이 쌓여간다는 건 포기한 횟수가 늘어간다는 뜻이었지만 아무렴 상관없었어요. 그만큼 많은 시도를 했다는 훈장이잖아요. 시간이 흘러 다시 꺼내봤을 때 '왜 이런 걸 놓쳤지?'싶은 좋은 글감이 되기도 하고요.


나는 계속 포기할 거예요. 포기하고 또 포기해서 꼭 써야 할 글이 묻히지 않게 할 거예요. ‘포기’가 배추 셀 때나 하는 말이라며 한심한 패배처럼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학원에 남아 나를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던 친구들은 지금쯤 각자의 레이스에서 각자의 우물 정을 완성하고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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