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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진 May 12. 2020

출퇴근길에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다면

일 년 전 오늘, 3년 넘게 일한 회사에서 퇴사를 했다. 시원하기만 하지는 않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이토록 허전하고 불안할 줄은 몰랐다. 안 좋은 일들은 겹쳐서 몰아쳤고 퇴사한 지 일주일 만에 스스로 '백수'라는 낙인을 찍은 채 밤새 불안감으로 베개를 적셨다. 내가 미쳤나? 왜 멀쩡한 회사를 그만뒀지? 하며 아쉬울 것 하나 없던 커리어우먼은 하루아침에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잃어버렸다.


매일 글을 썼다. 그거라도 안 하면 죄책감이 들어서 썼다. (사표는 내가 썼지만) 직장과 사람을 잃고 불안에 떨던 나를 다독이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쓴 글은 때때로 자기 합리화였고, 변명이었고, 선의의 거짓말이기도 했으나 그 무엇이 되었든 글은 나를 돌아보고 나를 지키는 수단이었다. 또한 닥치는 대로 읽었다. 한창 심리학에 빠졌고, 전에는 거들떠도 안 보던 인스타그램에 떠돌아다니는 글귀까지 먹어치우듯 읽었다. 그러자 내가 왜 그렇게 불안에 떨었는지 더디지만 조금씩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를 당한 것과 같은 상태였다.


"현재가 만족스럽지 않으면 과거를 돌아보게 돼요."


과거의 기억으로 힘들어 하던 나에게 누군가 이 말을 해줬다. 과거에 사로잡히는 건 과거의 일 때문이지, 현재와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해 솔직히 흘려들었다. 현재가 과거의 기억에 큰 몫을 한다는 그 말을 이해한 건, 서른 넘어 평생 처음으로 나 자신에 대해 지독하게 생각해본 후였다. 그건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던 상황에 던져졌을 때, 내가 어떻게 나를 지켜내고 이겨내는지를 관찰하는 일이기도 했다.  


선릉역으로 이직한 후 한동안 전 직장이 있던 강남역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적응에 몸살을 앓기도 했지만, 수습 기간이 끝날 무렵쯤엔 강남역으로 출근하던 날을 까맣게 잊을 만큼 선릉 사람이 되어 있었다. 곁에 있던 사람들을 잃은 후엔 다른 세상으로 나가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빈 자리를 채워냈다. 글을 쓰든 책을 읽든 사람을 만나든 내가 어떻게든 현재를 지켜내는 힘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은, 나를 과거에서 흔들어 깨우고 일으켜 세웠다.


출퇴근하는 버스 안에서 유독 과거 기억에 사로잡힌다면, 그건 과거의 기억과 버스라는 장소가 연결하는 묘한 여운 때문이 아니라 집에 가는 길이 심히 지루해서일 가능성이 높다. 과거는 추상이지만, 우리의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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