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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진 Jun 01. 2020

울어도 지지 않는 세계

누구보다 독하고, 강해보였던 지선우(김희애)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 바다에 뛰어든 것까지는 그래, 오죽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있어서는 안될 일이지만 드라마에선 흔히 일어나는 일이니까. 그런데 윤기(이무생)가 한 몸 바쳐 그녀를 거친 파도 속에서 꺼내고 다행히 끊어질 뻔했던 숨이 돌아왔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 버렸다. 방금 생을 마감할 뻔했던 여자가 눈물을 참고 있었다. 윤기는 그런 선우를 안쓰럽게 품에 안고 말했다. "울어요, 울어. 마음껏 울어."


정신 평화를 위해 <부부의세계>를 보지 않으려고 했다. 남의 이혼, 불륜, 폭력, 배신, 불신, 타락을 보며 속을 태울 게 뻔했기 때문이다. 어쩌다 틀어놓은 TV에서 재방송을 하기에 굳이 채널을 돌리지 않았을 뿐인데 나는 어느새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 '미친 거 아니야?'하며 열불을 내고 있었다. 어린 여자와 바람난 남편의 심장에 가위를 찔러넣는 선우의 상상 속 장면과 극명하게 대비될 만큼 선우는 가정 파탄이라는 사건 앞에서 지독히 감정을 억제했다. 불륜을 저지른 남편 앞에서도, 불륜녀와 그 가족들 앞에서도 늘 침착했고, 절제했다.


"다 보여주지마."


사회에선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이 곧 지는 일이 되기도 했다. 화가 나면 화가 난대로 표정을 드러내는 나에게 사람들은 '다 보여주지 말라’고 조언했다. 분명 동료들도 나와 같이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나 혼자만 씩씩대고 있었고 그런 나는 당연히 미운오리새끼가 됐다. 때론 감정을 감출 줄도 알아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그게 어디 맘처럼 쉽게 되는가. 나는 그때부터 고장난 사람처럼 웃었다. 당장 화가 난 감정을 감춰야 한다면, 일단 웃음으로라도 무마하는 게 편했다. 내 나름의 절제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때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울어요, 울어. 마음껏 울어.”라고 말해주었다면 어땠을까. 이제 항상 밝게 웃기만 하거나 과하게 침착한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쓰인다. 매일 밝게 웃을 일만 있는 사람도,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림없이 침착할 수 있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어느 한 술집에서 지인들을 만나 술 한 잔을 하다 생각치 못한 말을 듣고 화가 난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또 습관처럼 웃음을 짓고 도망치듯 집으로 달려와 오래도록 샤워를 했다. 겨우 샤워를 마치고 나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남겨진 지인들의 문자를 봤을 때, 내 마음은 꽉 찬 쓰레기 봉지가 찢어진 것처럼 쏟아져 버렸다.


방금 죽을 뻔 했던 선우가 “마음껏 울어.”라는 말에 그제야 막 태어난 아기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어찌할 도리없이 터져나와버린 선우의 눈물에 나는 오히려 안도감이 느껴져 눈물이 멈췄다. 우리에겐 다 보여주면 지는 것이 아니라 울고 싶을 땐 실컷 울 수 있는, 울어도 지지 않는 세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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