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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진 Jun 03. 2020

오천 원짜리 커피의 값어치

퇴근 후 소파에 누워 리모컨을 붙잡고 멍하니 TV를 보는 습관이 아주 옛날, 사냥을 마치고 불쏘시개를 들고 불을 피우던 원시시대부터 이어져온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바쁘게 일을 하는 오후에도 종종 잠깐의 멍 때림이 필요한데, 딱 좋은 핑곗거리는 바로 커피를 사러 가는 것이다. 직장인인 나는 평균적으로 하루에 커피를 한 잔, 때로는 두 잔도 사 마신다. 동료에게 커피를 쏘는 날엔 세 잔 이상도 산다. 그런데 솔직히, 매번 커피값에 마음이 쓰인다.


대학시절, 카페 문화가 성행하기 시작했다. 스타벅스, 카페베네 등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과방에서 휴강 시간을 때우던 대학생들이 카페로 몰려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게 5,000원짜리 커피는, 몇 개월 동안 모아둔 용돈으로 큰 마음먹고 나이키 운동화를 사는 정도의 소비였기 때문에 카페에 가자는 친구들의 말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물론 아주 더운 여름날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주는 것은 황홀했지만 자판기로 뽑은 500원짜리 음료수와 아주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하던 나로서는 음료수에 5,000원을 내는 것은 어딘가 이치에 맞지 않아 보였다.


시급 5,000원짜리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였기 때문에 커피 값이 더 크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편의점 계산대에 한 시간 내내 서서 바코드를 수십, 수백 번 찍고 갖가지 물건을 나르고 진열하고 나서야 받는 돈이 한 입에 호로록 마셔버리고 말 음료수 한 잔 값과 같았기 때문이다. 스타벅스 로고가 그려진 일회용 컵을 들고 거리를 걸으면 명품백이라도 맨 것처럼 기분이 한껏 좋아지기도 했지만, 그렇게 힘들게 번 돈을 잠깐의 사치에 투자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 마음을 내비치기가 좀 부끄러워서 친구들 앞에선 애써 담담한 척 커피를 사기도 했다.


그러나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자의든 타의든 커피를 살 일이 많아지면서 5,000원이라는 커피 값에 점차 적응이 되어갔다. 주말에 에세이를 쓰려고 분위기 좋은 카페를 찾아다니면서 더 익숙해졌다. 본전은 뽑겠다는 심정으로 글을 쓰면 더 잘 써지기도 했다. 우리 회사 건너편에 있는 테라로사 같은 카페에서는 핸드드립 커피값이 무려 8,000원이지만 그 맛과 공간을 한번 경험하면 또다시 그 값을 지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렇게 자주 커피를 사 마시다 보니 자연스럽게 카페에서 파는 커피 맛에 중독되었고, 그의 절반 값도 안 되는 캔커피와는 차원이 다른 맛으로 인식하는 경지에 올랐다.


몸에 밴 습관처럼 여전히 커피값에 마음이 쓰이지만 나는 오늘도 점심을 먹고 카페에 가서 5,000원짜리 커피를 사 마시며 커피 향 가득한 공간과 고급 원두가 가져다주는 특별한 가치를 즐길 것이다. 온종일 긴장 상태로 사냥을 하던 사냥터에서 빠져나와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며 멍을 때리는 원시인처럼, 노트북 앞에서 씨름을 하던 나에게 커피 한 잔으로 짧게나마 재충전할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해주는 것도 꽤 괜찮은 셀프 응원 아니겠는가. 다만 쿠폰 스탬프 적립은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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