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돌리지 말고 화가 난 이유를 말해!"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에서 양호랑과 심원석은 7년째 연애 중인 커플이다. 주변 친구들이 하나둘씩 결혼을 하면서, 호랑도 원석과 결혼할 날만 간절히 꿈꾸지만 원석은 더 나은 경제 조건을 만들기 전까지는 결혼할 생각이 없다. 그러던 중, 두 사람은 호랑의 가장 친한 친구의 결혼식에 함께 참석하고, 그날 호랑은 부케까지 받는다. 결혼하고 싶다는 신호를 백 번, 천 번을 줘도 못 알아듣는 원석. 호랑은 결혼식을 마치고 지인들과 함께 간 술집에서 버럭, 화를 내고 뛰쳐나간다.
"나 오늘 부케 받은 거 봤지"
"응, 봤지. 그래서 그게 뭐. 응?"
"부케 받고... 6개월 안에 결혼 안 하면 결혼 못하는 거 알지?"
"아니 호랑아, 갑자기 무슨 미신 얘기야. 말 돌리지 말고 화가 난 이유를 말해야 할 거 아니야."
"결혼!! 결혼!!!"
개그 프로그램에서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커플들의 다툼 레퍼토리. 여자는 단단히 화가 났고, 남자는 미안하다고만 한다. 여자가 "뭐가 미안한데?"라고 물어보면 남자도 슬슬 열이 나기 시작하면서 "말을 안 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라고 맞받아친다. 워낙 단골 레퍼토리라서 그런지 내 머릿속에도 언제부턴가 여자와 남자의 대사가 못이 박힌 듯 무시무시한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았다.
그 생각이 조금 달라진 건, 한 친구에게 "나도 너처럼 세심했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들은 후부터였다. 이 친구는 나와는 성격이 정반대로, 뒤끝이 없고 쿨한 성격이지만 상대방의 감정 변화를 세심하게 살피지 못했다. 그래서 남자 친구가 자신에게 느낀 서운함을 빙빙 돌려 말해도, 자신은 남자 친구가 왜 그러는지 도무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친구는 그런 남자 친구에게 불만을 갖기보다는 그런 남자 친구를 안쓰러워했다. 빙빙 돌려 말하느라 혼자 속으로 얼마나 마음고생할지를 아는 것이다. 자신이 그 마음을 바로 알아채 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또 본인의 성격이 그렇지 않으니 본인 나름대로 답답함이 쌓인다.
호랑이가 말을 돌린 걸까? 곧바로 '결혼하고 싶다'라고 말하면 될 것을. 뜻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부케 따위로 말을 돌려 소통에 혼선을 초래한 것일 수도 있다. 원석이가 호랑의 뜻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든, 진심으로 몰랐든, 호랑이는 절대 '결혼'이라는 단어부터 꺼내지는 못했을 것 같다. 느끼한 피자가 먹고 싶다는 사람에게, 오늘은 매운 게 당기니 닭발이나 먹으러 가자고 할 사람이 못 된다.
소통의 단계. '결혼'과 같이 쉽게 꺼내기 어려운 말을 할 때 부케를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고 부케, 웨딩드레스, 프러포즈 등 결혼과 연결되는 말들로 단계를 밟아 말하는 사람도 있다. 호랑이는 나와 같은 후자였을 터. 호랑은 원석에게, 결혼이 하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지 몰라 조심스럽고, 또 조심스러웠을 뿐이다.
친구는 내가 세심해서 좋겠다고 했지만, 나는 사실 원하는 것을 직접적으로 말하고 얻어낼 줄 아는 친구가 부러웠다. 상대적으로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표현할 줄 모르는 답답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어렸을 적엔 "엄마, 나 저거 사줘!"라고 말하는 친구들이 부러웠고, 어른이 되어선 "저 지금 기분 나쁘니까 사과하세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사고 싶은 것은 사고, 사과받을 것은 받는, 아주 간단하고 명료한 이치를 나는 그토록 어려워했다. 엄마의 생활비가 빠듯할까 봐,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까 봐 걱정이 앞선 것이다.
그래서 호랑이의 외침이 더욱 아프다. 몇십 년을 함께 산 가족도 말을 안 하면 속마음을 모르는 법. 말하지 않으면 쉬이 그 속뜻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오래 같이 살면 살수록, 가까운 사람일수록, 내가 상대방에 대해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착각을 갖고 상대방의 감정을 더 헤아리려 하지 않는다. 친구는 비록 상대방의 감정 변화를 섬세하게 헤아리진 못해도, 헤아리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처음부터 잘 맞는 관계도 좋지만, 잘 맞춰가는 관계가 더 단단하게 지속된다.
“결혼!!!”이라고 터뜨려야 하는 호랑이나 “결혼!!!”이라고 터뜨려줘야 화난 이유를 알아채는 원석이나 둘 다 어렵긴 마찬가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