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잠깐 할 말 있어요"
여자 래퍼 서바이벌 프로그램 <언프리티랩스타1>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장면은 래퍼 제시가 손을 들고 이 말을 하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언프리티랩스타>는 여자 래퍼들이 오로지 랩 실력만으로 경쟁하는 프로그램인데, 제시는 경쟁 상대들이 자신의 성격이나 '분위기를 다운시킨다'는 이유로 낮은 점수를 주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제시는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손을 들고일어나 "This is competition(이건 경쟁이야)"라고 말하며 또 한 번 분위기를 차갑게 만든다.
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제시의 모습 위로 내 모습이 겹쳐 보인다. 분위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 퇴사하겠다는 직원이 얄미워 정상 퇴직 처리를 해주지 않는 상사가 있었다. 그는 남아있는 직원들을 앉혀놓고 실컷 그 직원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더니 혹시 할 말 있는 사람 있냐고 물었다. 나는 할 말이 있다며 손을 들고 "저도 퇴사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사회초년생의 패기가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지, 지금 다시 하라면 간담 서늘해서 하지 못한다.
흘러가는 방향대로 흘러가게 두지 못하고, 왜 굳이 힘들게 손을 들고일어나서 분위기를 불편하게 만들었을까. 어릴 적엔 그저 남들보다 앞에 나서길 좋아해서 그런 줄 알았지만, 어른이 되고 보니 그것은 단순히 나대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부당함을 참지 못하고 조금 더 (자신이 생각하는) 공정한 방향으로 바꾸어 나가려는 힘이 남들보다 강력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요새는 예전에 비해 '저 잠깐 할 말 있어요'라고 말하며 손을 들 에너지가 많이 없어졌다. 제시가 상대 래퍼들을 향해 부당함에 대해 쏟아낼 때, 상대 래퍼들은 속으로 '누가 이 상황을 빨리 좀 끝내줬으면'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나도 다수에 파묻혀 불편한 상황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기도 한다. 그래 보니 알겠다. 그게 얼마나 맘 편하고, 둥근 모서리처럼 안전한 일인지. 굳이 뭐하러 할 말 있다고 손 들고 나서서 '상황을 불편하게 만드는 애'라고 손가락질당하면서 사는가.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손 들고 일어서서 할 말은 하는 타입이라면, 딱 한 번만 눈 감고 부당함을 지나쳐보면 알게 될 것이다. 얼마나 일이 부드럽게 풀리는지. 얼마나 내 가능성이 좀먹는지.
만약 제시가 '분위기를 다운시킨다'는 이유만으로 낮은 점수를 받고, 랩 실력을 키우기보다는 분위기를 띄우는 분위기 메이커로 거듭났다면 어땠을까. 예능상은 받았을지 몰라도 실력 있는 래퍼라는 평가를 받기는 힘들지 않았을까? 손을 들고 퇴사하겠다고 말한 그 순간은 내 평생 가장 잘한 일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다. 방법은 다소 어리숙하고 거칠었으나 그때 손을 들지 않았더라면 나는 여전히 내가 그러한 부당한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내가 가진 가능성을 더 좋은 세상에서 키워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손을 든다는 건, 바꾸겠다는 의지다. 개인의 부당함에 대해 할 말이 있는데, 상황을 불편하게 만들까 봐 고민이라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This is competition."을 외치는 제시를 떠올려보자. 일은 일답게 하자고 말할 것인가, 분위기 메이커가 될 것인가. 이 사회는 언프리티랩스타가 아니지만, 분위기 메이커만 가득한 사회에 변화는 없다. 분위기 메이커는 회식 시간의 활약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