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추석을 앞둔 어느 날, 추석 스트레스로 몸살을 앓고 있던 모든 이들의 가슴을 뚫어줄 칼럼 한 편이 올라왔다. <공부란 무엇인가>의 저자, 김영민 교수의 칼럼이었다. 이런 칼럼을 전에 본 적이 없어서 이것이 정말 경향신문의 칼럼이 맞나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화목한 추석', '즐거운 추석'과 같은 가식적인 말 하나 없이, 우리가 느끼고 있는 추석에 대한 공포심을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당숙이 “너 언제 취직할 거니”라고 물으면, “곧 하겠죠, 뭐”라고 얼버무리지 말고 “당숙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추석 때라서 일부러 물어보는 거란다”라고 하거든, “추석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엄마가 “너 대체 결혼할 거니 말 거니”라고 물으면, “결혼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거기에 대해 “얘가 미쳤나”라고 말하면, “제정신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아버지가 “손주라도 한 명 안겨다오”라고 하거든 “후손이란 무엇인가”. “늘그막에 외로워서 그런단다”라고 하거든 “외로움이란 무엇인가”. “가족끼리 이런 이야기도 못하니”라고 하거든 “가족이란 무엇인가”. 칼럼 원문 보기
추석은 언제부터 웬만한 공포 영화보다 더 무서운 것이 되어버렸을까. 이름도 잘 모르는 친척들과 어색하게 마주보고 앉아 어른들이 깎아다 주신 과일을 입에 물고 최대한 오래 오물오물 씹어먹었을 때부터? 그때는 그래도 참을 만했다. 아마도 대학을 졸업한 뒤 백수 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였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 친척들은 직접적으로 "취직은 언제 하니?"라고 물어보시는 분들은 아니었지만 괜히 내 마음이 쫄아들어 있었던 것 같다. 친척 분들도 물어보고 싶어서 물어보는 것은 아닐 터. 지금 생각해보면 그분들도 "수진이는 요새 무슨 일 해?" 말고는 물어볼 말이 딱히 없다. 갑자기 1년 만에 만나서 "어제 뭐했어?"라고 물어보기도 참 이상하고.
세상이 많이 달라져 '결혼' 이야기를 꺼내기가 많이 어려워졌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결혼'은 빠질 수 없는 주제다. 내가 결혼을 안 했다고 하더라도 친척 중 누군가 한 명은 최근에 결혼을 했으니까. 자연스럽게 결혼 이야기가 흘러나오다가 "수진이도 때가 되면 하겠지~" 정도로 마무리가 되면 양호한 편. 얼마 전에는 엄마가 손주를 돌보고 계시는 이모와 통화하는 소리를 우연히 들었는데, 아마도 이모가 수진이는 결혼 안 하냐고 여쭤보신 모양이었다. 엄마는 서둘러 목소리를 낮추더니 "그런 얘기 수진이 들으면 싫어해"라고 하셨다. 그 말씀만 안 하셨어도 무슨 통화 내용인지 몰랐을 텐데.
김영민 교수의 칼럼은 한 번 읽으면 웃기지만, 두 번 읽으면 심오해진다. 평소에 '~란 무엇인가'라고 자문해볼 일이 적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진심으로 어떠한 것의 정의에 대해 생각하고 말을 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당숙은 왜 나의 취직 계획을 물을까. 내가 생각하는 당숙이란 어떤 사람이고, 나와는 어떠한 관계일까? 당숙이 나의 취직 계획을 궁금해할 만한 이유는 무엇일까? 추석에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은 나의 취직 계획에 대해 논하기 위함일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까.
추석이 돌아왔다. 어김없이 잘 모르는 머나먼 친척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취직도, 결혼도, 출산도, 모두 금지어라면 차라리 서로의 이름으로 아이엠그라운드 게임을 해보면 어떨까. 매년 서로의 이름만 잘 외워도 의미 있는 명절이 될 것 같은데.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누가 대답 좀 해주오. 추석이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