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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진 Mar 30. 2021

당신의 말투를 따라 했을 뿐인데요

"방어력이 대단하시네요"


주고받는 말은 총탄에 가까웠다. 상대방은 내게 방어력이 대단하다고 했지만 내가 쓴 방법은 별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 사람의 말투를 따라 했을 뿐이다. 표정은 웃고 있으니 자칫 속아 넘어갈 만도 했으나 나의 경험치도 이제 더 이상 어린애 수준이 아니었으므로 상대방의 말에 악의가 담겨 있음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묘하게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말투, 여러 사람과 함께 있을 때와 단둘이서 대화를 할 때의 격차를 느끼며 어떻게 하면 상대방의 말투를 성숙하게 꼬집어 줄 수 있을지 고민했다.


뾰족한 방법은 없었다. 정답이 있는 문제도 아니고, 나의 착각일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면 내가 써볼 수 있는 방법은 하나. 상대방의 대화 방식을 그대로 따라 하고 상대방의 반응을 엿보는 것이다. 별다른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상대방의 얼굴은 금세 상기되었다. 보통 우리는 대화를 할 때 팔짱을 끼거나 머리를 만지는 상대방의 행동을 은연중에 따라 할 정도로 상대방이 나와 비슷한 행동을 할 때 호의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던가? 당신을 따라 했을 뿐인데 방어를 했다고 느끼다니, 상대방은 그동안 내게 대화를 한 것이 아니라 기술을 써온 것이었다.


말하기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들도 수없이 많다. 그저 말재주가 없어서, 또는 성격이 소심해서 말을 웅얼거리고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것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안 좋은 말하기 습관을 많이 갖고 있거나 말하기의 중요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다. - 김하나, <말하기를 말하기> 중에서


아르바이트생 분들 중에 "잔돈 500원이십니다"라거나 "주문하신 팝콘 나오셨습니다"와 같이 사람이 아닌 물건에까지 극존칭하여 말을 하는 분들이 있다. 나도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주 사용했던 말투인데, 틀린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고쳐 쓰지 않았다. 상냥하고 친절하게 서비스를 제공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이 나와버리곤 했다. 고객을 배려하는 마음에 나온 실수이니, 그 정도 틀리게 사용한다고 크게 나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고객 분들도 자신을 배려하는 마음에 나온 실수라는 것을 알고 계산이 조금 늦어지거나 주문한 음식이 잘못 나와도 화를 내기보다는 차분히 기다리며 아르바이트생을 더 배려해주었다.


잘못된 어법보다 더 잘못된 말은 어쭙잖은 기술로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려는 의도를 담은 말이다. 한 번은 미용실에서 뿌리 염색을 하고 집에 와서 보니 정수리 쪽만 노랗게 물이 들어버린 적이 있었다. 꽤 염색을 많이 해온 나로서는 크고 작은 사고를 여러 번 겪어왔지만 이 정도로 심하게 잘못 염색이 된 것은 처음이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퇴근하자마자 미용실로 달려갔는데 맨 처음 들은 말이 "그래서 제가 미리 색깔 보여드렸잖아요"였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자신은 염색을 하기 전에 미리 색깔을 보여줬으니 잘못이 없다는 말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바로 어제는 나와 시시닥 거리며 염색을 하던 그 디자이너가, 오늘은 같은 말만 반복하도록 코딩된 로봇 같았다. 내가 더 이상 논쟁의 가치를 느끼지 못했으니 그 디자이너의 기술이 먹혔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날 이후로 그 집에 발을 끊었다.


한동안 서점 가판대에 '화술' 관련 책이 넘쳐났을 정도로 말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나 역시도 말보다는 글이 편한 사람이다 보니 말을 더 정확하게 내뱉고,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달하는 화법을 배우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아무리 또박또박하게 발음해도 그래서 도대체 말하고 싶은 게 뭔지 잘 모르겠는 사람이 있고,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알겠는데 상대방의 말이 내 마음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좋은 화법이란 당신과 소통하고 싶다는 진심에 달려 있지, 누군가를 내 의도대로 움직이려는 의도나 기술이 먼저 앞설 순 없다.


아마도  사람은 아직도 모를 것이다. 내가 방어력이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당신의 말투를 기똥차게  따라 하는 성대모사꾼에 가까웠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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