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에는 새로운 형태의 워라밸이 필요하다.
스타트업에서 일한다고 하면 아무래도 복지가 좋을 것만 같다. 자율출퇴근과 자유로운 연차, 산처럼 쌓여있는 간식들, 수평적인 분위기에서 자유롭게 일하는 분위기까지. 이런 곳에서 일한다면 워라밸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 같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스타트업, 그리고 스타트업을 포괄하는 규모가 작은 회사 안에서 워라밸이 다루어지는 형태는 상이하다. 그리고 앞으로 그 간극은 더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A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가상의 인물 예린씨를 생각해보자. 예린씨는 마케팅 업무를 맡고 있다. 마케팅 직무이긴 하지만 회사는 5명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여러 업무를 동시에 진행한다. 회사는 애자일 방식을 도입하고 있고, MVP(Minimum Valuable Product)를 만든 후 테스트 하고 피드백을 반복한다. 회사는 기존 시장에 새로운 플랫폼을 도입하려고 시도 하고 있다. 이 시장에서 에어비앤비나 우버가 되고 싶지만, 지금 A는 에어비앤비나 우버가 아니기 때문에 이 시장에 걸맞는 방식으로 플랫폼을 확산 시키고 싶다.
예린씨는 마케터의 관점에서 매일 같이 새로운 형태의 비즈니스 모델을 상상하고 있다. 업무 중에도, 퇴근을 해서도, 심지어는 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서도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생각이 가득하다. 야근도 잦지만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구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주말에도 비즈니스 모델은 머리를 떠나지 않고, 시간을 들여서 리서치를 한다. 좋은 컨퍼런스나 박람회가 있으면 항상 참석한다. 밥을 먹으면서도 동료들과 비즈니스 모델에 대해 이야기 하고, 어떨 때는 부모님이나 형제들에게도 비즈니스 모델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정말 24/7 업무를 하는 것만 같다. 그럼 예린씨의 워라밸은 "망"인가?
지은씨는 예린씨 옆 자리의 영업 담당자이다. 신규 서비스를 기존 시장의 새로운 플랫폼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역시 초기 영업 담당자가 발로 뛰는 수밖에 없다. 이미 시장의 플레이어들은 자신들만의 비즈니스를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구축하고 있고 새로운 플랫폼을 사용해 볼 만한 유인이 뚜렷하지가 않다. 몇번을 만나봐도 플레이어들은 뜨뜻 미지근 하다. 그래서 수수료를 더 낮춰 준다는 거냐, 아니면 고객들을 더 물어다 준다는 거냐, 아니면 초기 서비스 이용 혜택이 있냐 같은 이야기만 반복한다. 지은씨 생각에는 애초에 지금 모델로는 비전이 없을 것 같기도 하다. 대표에게 내색은 하지 않지만 많이 답답하다.
외근이 끝나고 회사에 복귀하면 업무를 정리하고 일지를 쓴 후 퇴근한다. 몸은 녹초가 되어 있어서, 현관문을 열자 마자 우선 침대에 몸을 던진다. 잠시 후 지은씨는 편의점에 들러 사온 맥주와 안주거리를 세팅하고 미드를 보며 휴식을 취한다. 이렇게 쉬는 것이 다음날 다시 영업 현장을 누비는데 가장 큰 힘이 된다. 쉬어야 일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다시 아침이 오고 지은씨는 출근을 했다. 예린씨를 보니 전날 야근하면서 또 뭔가를 만들어 온 것 같다. 지치지도 않는지, 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예린씨가 대표와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며 왠지 불안하기도 하다. 예린씨가 주말에 관련 컨퍼런스를 가자고 제안을 했지만 이번주에는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해야 한다. 업무 시간 외에 더 업무를 해도 보상 받는 것은 없고 소소한 행복을 챙기자는 주의 이기도 하다.
이렇게 쉴 때 쉬고 일할 때 일하는 지은씨의 워라밸은 어떨까?
테일러식 업무 관리가 필요한 분야인지 생각해보자
쉴 때 쉬고 일할 때 일한다는 방침은 테일러 식 업무관리가 효율성을 좌우했던 중공업 중심 산업발전의 시기에 어울리는 생각이다. 컨베이어 벨트에서 초 단위로 제품이 이동하고 정해진 기간 안에 최대의 수율을 맞추는 것이 이익에 직결 되는 환경이라면, 노동자의 업무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추가 노동이 있을 경우 피로도를 관리해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 하면 추가 임금을 주는 형태로 인력을 관리해야 했다. 생산공정은 기본적으로 노동자를 소모하는 형태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력에 대해 감가상각을 고려한 자산관리 개념으로 접근해야 했다. 생산라인 뿐만 아니라 생산라인의 업무를 계약을 통한 판매로 완결 짓는 사무실에서도 마찬가지로 인력을 관리했다. 사무 노동자들은 납기에 맞추어 계약을 처리해야 하고 그에 따르는 절차들을 수행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얼마를 써서, 누가 했느냐를 부서마다 문서의 형태로 남기는 일은 컨베이어 벨트에서 순차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적 재화를 다룬다면 창발성을 관리해야 한다
하지만 지적 재화를 다루고 생산하는 경우에는 어떤가? 이 경우에는 업무가 기능적으로 쪼개지기 어려운 면이 있다. 기능적으로 쪼개지지 않는다는 것은 시간 단위나 특정한 행위 단위로 업무를 나눌 수 없다는 말이다. 플랫폼을 기존 시장에 진입시키려는 경우 네트워크 효과를 통한 확산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네트워크 효과가 만들어 지기 전에는 사용 유저들의 Referral이 긍정적인 순환고리를 만들어줘야 한다. 이러한 Referral을 형성하기 위해 MVP의 끊임 없는 개선을 통한 테스트가 수반된다. 여기서 세밀한 데이터 분석을 통해서 개선이 이루어진다. 이 때 인풋 데이터가 들어가면 아웃풋으로 "야 이거 해"라고 명확한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다양한 제반조건이 고려된 "창발"의 형태로 해결책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창발성은 정보의 끊임없는 인풋과 집요한 몰입에 의해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생각의 끈을 놓지 않는 것, 그리고 생각하기 위해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A 스타트업 같은 회사에서 일한다면, 업무와 생활의 단절을 통해서 워라밸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업무와 생활의 단절을 통해 단기적인 워라밸을 찾을 수는 있을 것이나 조직 전체에 이러한 문화가 깃든다면 조직의 경쟁력 상실로 폐업에 이를 수도 있다. 만약 조직 내에서 나만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 것이라면 장기적인 업무 기여도가 낮아지게 되어 조직을 나가는 선택지만 남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죽도록 일만 해야 하는 것일까? 애초에 "살아남거나 죽거나"를 강요당하는 생태계에 들어온 이상 죽도록 일만 하는게 맞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하더라도 상당히 하드한 업무량은 감당할 수밖에 없고, 살아남기 위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기 위해 발버둥 쳐야만 하는 것이다.
사실 지은씨는 근시일 내에 의사결정권자와의 의견 충돌이나 갈등이 발생할 확률이 크다. 성장지향적 사고로 변화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성장지향적 조직에서 버티디가 힘들다. 지속적으로 개인적인 성장과 조직적인 성장을 요구 받을 것이고 해야하는 업무 외의 성장을 위한 추가 업무, 학습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단기적인 워라밸 수호 작전은 비극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예린씨의 경우 시간이 지날수록 체력적인 문제가 닥쳐올 것이다. 하지만 성장의 달콤함으로 버틸 수 있게 된다. 스타트업에 종종 보이는 "성장 중독"에 걸린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이럴 때 업무에만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업무 속에 삶을, 삶 속에 업무를 녹여내는 개인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이른바 "약한 몰입"의 상태에 들어가서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다. 달리기를 계속하다가 번아웃이 오는 것을 방지하고 업무와 삶의 질을 동시에 높일 수 있는 방법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몰입"이란 개념은 칙센트 미하이의 <몰입의 즐거움>에서 언급되었는데, 수행 난이도가 어느 정도 있으면서도 오랜 시간을 투자하여 집중할 경우 나의 수준에서 해결할 수 있는 형태의 문제가 주어질 때 종종 관찰되는 상태이다. 서울대 재료공학과 황농문 교수는 몰입에 관한 책을 두 권 출간하면서 "약한 몰입"과 "강한 몰입"이란 개념을 소개했다. 여기서 내용을 자세하게 살펴볼 수는 없지만, 스타트업 업계 종사자 처럼 상당히 하드한 컨디션에서 업무를 해야하는 경우 "약한 몰입"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이야기 했던 것 처럼 업무를 통해 해결해야 하는 과제에 대한 생각의 끈을 놓지 않고, 생각을 이어가기 위한 재료를 계속해서 쌓아가는 것이다. 몰입의 원리에 의하면 몰입의 상태에서는 이러한 과정이 절대 고통스럽지 않고 즐거운 상태에서 이어지며, 약한 몰입의 경우에는 비교적 생각과 휴식의 완급조절이 수월하다.
이제는 주어진 프로세스를 수행하는 것 만으로는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어려운 시대가 된 것 같다. 특히 나를 비롯한 스타트업 및 스타트업-like한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더욱 그럴 것이다. 달성하기 어려운 워라밸의 조건에 침울해지지 말고, 진짜 "카르페-디엠" 할 수 있는 몰입의 세계에 들어서는 것을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