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행동의 당위성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어깨에 힘을 빼고 글을 쓰자고 다짐을 한 후 써 내려간 글들이 연거푸 브런치 메인이나 다음 홈페이지, 카카오톡 채널에 실리면서 수천 명의 독자들이 몰려들었다. 글을 써도 독자가 없어 고민하던 찰나 글이 인위적이면 안된다고,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글을 쓰자, 거짓말처럼 독자가 불어났다. 매일매일 수천 명의 독자들이 내 글을 읽고 가는 광경이 그저 신기하다.
그런데,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수천 명에 달하는 조회수가 목적이 아니고 제대로 된 글을 쓰고 독자에게 인정받자는 초심은 어디 가고, 이번 글은 몇 명이나 볼까, 이런 글이 독자들에게 먹힐까 고민하고 있다. 참으로 간사하다.
한 판 뒤집기
나는 역전을 좋아한다. 학생들의 성적 역전을 위해 오랜 세월을 살았다. 성적은 단지 그 점수가, 등수가 목적이 아니다. 자신감이고 희망이다. 성취를 통해 학생들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는다. 노력해서 얻은 성적은 자신이 하고 싶은 진로와 진학을 이끌어 주는 원동력이 된다.
학창 시절, 오랫동안 성적이 좋지 않아 헤매며 살았다. 자괴감, 열등감의 원천이었다. 다른 곳에서 나의 특별함을 뽐내려 했다. 때로는 일탈로 이어진다. 그러나, 결국 학생은 성적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전교 부학생회장으로 선출되었을 때, 그 마음은 더욱 커졌다.
진정성이고 싶은 공명심
학급을 위해, 조직을 위해, 단체를 위해 봉사하고 싶었던 걸까, 나의 만족을 위한 것이었을까. 자리를 탐했고 자리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본 것은 아닐까. 대학에 와서, 내가 일을 하지 않아도 학생회는 돌아가고 조별 프로젝트는 완성이 되는구나를 느꼈을 때, 나의 위치, 나의 존재에 대해 고심을 하게 되었다.
세상은 넓고 인물은 많다. 나를 위해 자리를 원했고 그 자리를 얻어 일을 했더라도, 진심이 없는 행동과 노력들은 잔상을 남기지 못하고 이내 잊혀진다. 세상의 이치, 자연의 순리는 이상하리 만큼 진솔하다. 깔끔하다. 질이 떨어지는 제품은 소비자가 외면하고 맛없는 식당은 손님이 끊긴다. 한 번은 팔 수 있어도 두 번은 팔 수 없다.
나 자신도 마찬가지다. 한 번은 뽑힐 수 있어도, 한 번은 발언할 수 있어도 두 번의 기회는 없다. 두 번, 세 번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팀이, 조직이, 회사가, 세상이 결정한다.
공명심은 공명심으로 나타나고 진솔함은 진솔함으로 나타난다. 결국 내면의 내 자신이 진정성을 바탕으로 삶을 살아야 가야 한다. 삶의 깊은 곳, 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진정성이 올라와 생각과 행동 곳곳으로 퍼져나가야 함을 깨닫게 된다. 세상은 이상하리 만큼 알아보니까. 말은 쉬우나 여전히 실천이 어려운 영역이다.
독립된 주체
언젠가부터 나를 잃어버리고 산다. 누군가의 아내로, 누군가의 남편으로, 누군가의 아빠로, 엄마로, 아들로, 딸로, 누군가의 선배로, 누군가의 후배로, 직장의 소속원으로, 모임의 회장으로, 총무로...
그저 집단에 소속되어 인정을 받으려 했다. 가족도 하나의 집단이 된 것일까. 인위적으로 내 위치를 조정하려는 자신을 발견한다. 언제부터 자유가 없어졌고 언제부터 겉치레에 신경을 쓰게 된 것일까.
독립은 자유나 방탕, 오만이나 고집과는 다르다. 스스로 단단한 존재, 주체로서 살고 싶은 강렬한 욕구이다. 자신의 삶을 오롯이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고 싶은 마음의 고백이다.
그렇게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다 보면, 나는 어느새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선배, 누군가의 존재로 돌아와 있다. 그러나, 그런 위치가 나의 주체성은 아니다. 나의 주체성이 그 자리를 인식할 때, 나는 나로서 온전히 존재한다.
이기적인 외로움
이율배반적으로, 한편 외롭다. 외로움은 존재에 대한 인식이다. 어딘가의 한 조각으로, 누군가의 한 사람으로 살고 싶은 사회적 갈망이다. 독립적이면서 외롭지는 않고 싶은, 이 마음은 결국 이기심이다.
스스로 풍요롭지 못해 외로움은 생겨난다. 받고만 싶은 거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도 있는데. 꼭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니, 받아야 하는데 못 받는다고 생각하니 외로움은 시작된다. 내 마음이 채워지고 내 마음이 넘쳐나면, 내가 누군가의 외로움을 채워줄 수 있는 따뜻한 존재가 될 수 있다.
대가 없는 도움
언젠가 도움을 주면서 반대급부를 바라는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도움이라는 미명 하에 인정을 받으려고, 군림하려고 하는 자신을 보며 깜짝 놀랐다. 도움이란 대가가 있는 것이 아니다.
도움은 기브앤테이크(give & take)가 아니다. 그것이 기브앤테이크라면, 그것은 도움이 아니라 '거래'다. 거래를 할 거라면 명확하게 거래라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 거래를 가장한 도움은 일말의 전정성마저도 깎아 먹게 된다. 거래를 하면서 도움을 줬다고 하지 말자. 그 도움은 상대에게 빚처럼 그득하게 남아 있다.
도움을 줄 때는 뒤를 보지 않는다. 훗날을 기약하지 않는다. 대신 신중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도움을 줘야 한다. 나도 섭섭하지 않고 상대도 섭섭하지 않은, 나도 부담이 없고 상대도 부담이 없을 때, 나의 도움은 진짜 도움이 된다.
쓰다 보니 끝이 없다. 정리도 잘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는 명확해진다. 삶의 철학을 세워야 한다는 것. 여전히 내 삶은 무겁고 삶의 철학은 가볍다는 것. 언제고 어디서든 삶을 통찰하고 진리를 얻어야 한다는 것.
끝으로 통찰 질문 몇 가지를 스스로에게 던져 본다.
Q.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싶습니까?
Q. 당신의 삶에서 꼭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Q. 당신은 당신의 삶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요?
Q. 당신의 삶의 철학은 무엇입니까?
더 나은 삶을 위해, 오늘도 아디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