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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k Jul 21. 2020

작지만 소중한 생명

항상 함께하는 반려 동물이라는 존재

어릴 적에는 강아지를 아주 무서워했다. 길에서 강아지를 마주치는 날이면 어김없이 그 길을 돌아 다른 길로 다녔다. 멀리서 바라만 봐도 무서웠던 강아지. 그런 강아지가 어느 날 나의 시간으로 들어왔다. 오랫동안 살아왔던 곳을 떠나 새로운 일을 하면서 압박과 불안이 찾아왔다. 나는 못 느끼고 있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그렇지 않았다. 무감각한 표정과 말투에서 정서적으로 힘들어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어느 날 집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00의 친구가 키우던 강아지인데 더 이상 키울 수 없어 인터넷에 올려도 보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을 하기도 하는데 데리고 갈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단다. 우리가 데리고 올까? 조용하고 얌전한 아이여서 괜찮을 듯한데" 그 말에 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해 달라고 했다. 쉬는 날 차를 끌고 집으로 갔다. 어떤 강아지인지 보지도 못한 터라 궁금하기만 했다. 방에 들어서서 "어디 있는데, 어디 있어?"라고 말하는 찰나, 이불속에서 엉덩이를 들이밀며 뒷걸음질하는 꼬물이 강아지가 보였다. 말이 강아지이지 나이가 든 강아지였다. 그래도 내 눈에는 이쁘고 사랑스럽고 귀엽기만 했다. 그래서 나에겐 강아지로 보였다.


한 번도 강아지를 가까이 한적 없는지라 어떻게 안아야 할지, 말을 건네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가족은 안는 법부터 산책시키는 법까지 하나씩 알려줬다. 산책하는 것조차 버거워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는 나 때문인지 강아지가 눈치를 보는 듯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책임 못 질 거면 데리고 가지 마라"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하셨다. 그 말에 마음을 다잡고 목줄을 걸고 산책을 나갔다. 어찌나 신나게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던지, 그날 밤 이불속에서 내 품으로 꼬물거리며 들어오는 녀석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너무 작고 부드럽기만 해 잘못 만졌다가 다치는 것은 아닌지 무섭기도 했다. 신나게 놀다가 볼일을 보면 그것을 치워야 하는데 어떻게 뒤처리를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용기를 내어 집에 데리고 왔다. 집에 온 첫날에는 출근하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낯선 환경에서 나를 보며 낑낑거리던 그 모습이 눈에 밟혀 하루 종일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퇴근하자마자 집으로 뛰어갔다. 일주일 내내 야근에 시달리던 때라 주말 오전에라도 산책을 시켜 주기 위해 차를 끌고 공원을 찾곤 했다. 그런데 점점 게을러지는 나를 발견하게 됐다. 넘쳐나는 일에 너무 피곤하고 몸이 아프다 보니 바깥나들이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이 아이와 눈을 마주하고 노는 시간이 줄어든 것이다.


여섯 살쯤 되었던 이 친구는 아픈 곳이 있었다. 집에 데리고 오자 마자 동물병원을 찾았는데 겉으로는 건강해 보였지만 피부 습진도 있었고 소화기에도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아는 지인의 지인이 돌보던 강아지였던 지라 그냥 말없이 병원에 데리고 다니면서 나의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중 주변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강아지와 함께하면서 내가 참 편안해 보인다는 것이다. 일을 할 때면 예민하고 민감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일을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편안함과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의 크기나 생명의 시간에 비하면 작고 짧기만 한 견생이지만 이 작은 아이가 나누어 주는 생명의 힘은 거대하기만 하다. 눈을 마주하고 있으면 편안하고 고요해진다. 곁에 누워 있으면 시름과 걱정이 모두 녹아내린다. 언어는 다르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서로의 눈빛과 태도로 대화가 되기 시작한다. 사람은 사람 말로 강아지는 짖는 소리로 표현을 하지만 이상하게 그 사이에는 소통이라는 마법이 펼쳐진다. 목욕을 시켜주는 일이 귀찮아지기도 하지만 볼일 본 것을 치우고 뒤처리를 할 때면 짜증 나기도 하지만 이상하게 투덜 되는 말투 뒤로 미소가 자리 잡는다. 뭔가 '내가 널 위해 노력하고 있어'라고 자랑하고 싶어 투덜 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최근에 부모님이 아프셔서 집을 자주 비우게 되다 보니 부모님 댁에 있는 강아지들이 불안해 하기 시작했다. 어쩔 줄 몰라하는 아이들이 안쓰러워 데리고 왔다. 목욕을 시키고 밥을 주고 배변패드를 깔고 주의 사항을 알려줬다. 그렇게 몇 시간을 보내고 나니 저녁이 찾아왔다. 어느 순간 코 고는 소리가 들린다. 이쁜 꼬물이들이 이곳저곳에 누워 잠을 자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는 것조차 행복하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진다. 장난을 걸어보고 싶지만 참고 곁에서 지켜보기만 한다. 그렇게 지켜보다 보면 인기척이 느껴지는지 간혹 눈을 뜨기도 한다. 


이상하게도 강아지와 함께 있으면 내가 보호자 같고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무거운 책임감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에게 어떤 생명에게 필요한 존재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이유 없이 행복하고 즐겁고 기분이 좋아지기만 하는 것 같다. 그렇게 강아지와 마주하고 있는데 이전보다 부쩍 나이가 든 것 같은 한 아이가 유독 눈에 들어온다. 내 곁에 있던 강아지와 비슷한 시기에 우리 집에 온 아이이다. 아주 건강했는데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가기만 하는 것 같다. 내 곁에 있던 강아지가 무지개다리를 건넌 지 어느덧 5년이 지났다. 요크셔테리어였던 나의 강아지. 부모님이 돌보고 있는 이 아이도 요크셔테리어이다. 금색에 검은빛이 소복이 박힌 듯 미끄러지는 털이 매력적인 요크. 무지개다리를 떠난 그 아이의 끝자락이 떠오른다. 무한한 사랑을 주고 떠난 나의 반쪽. 인간보다 너무 빨리 떠나야 하는 강아지의 시간이 야속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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