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여기 있을 이유.
피 끓던 신규시절,
남들은 4시 30분 퇴근이라 부러워해도
어둑어둑해져서야 마지막으로 교문을 나섰다.
아파트에 둘러싸인 학교에 근무할 때는
"선생님 10시까지 교실에 있었죠?" 라며 아이들이 내 퇴근 시간을 체크하기도 했다.
그 한 해 한 해가 모여
다양한 이력과 자신감도 얻었다.
어떤 학교 업무도
아무리 힘든 아이도
두려울 게 없었다.
교사로서
가장 자신 있을 때
가장 잘 나갈 때
교사들이
가장 선호하지 않는 학교를 갔다.
그리고 3월을
매일 퇴근하는 차 안에서 울었다.
자만해질 뻔했던
적절한 시기에
나에게 겸손을 가르쳐 준
사연 많은 아이들로 가득한 작은 학교였다.
그리고 지금의 학교.
아이들도 순하고, 동료들도 좋다.
그런데 도통 집중이 안된다.
힘이 안 난다.
아이들과 새로운 걸 시도하는 게 버겁다.
그리고 서이초 일.
더 무기력해졌다.
아이 학원 원장님과 상담하는데
원장님의 자신감이 부럽다.
학원의 엄격한 <생활태도 벌점제>는 더 부럽다.
'학교보다 학원이 나으려나.'
'이력서나 한 번 넣어볼까'하는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10년 전만 해도
내 약을 지어주는 약사를 보며
'참 재미없겠다. 생동감이 없잖아!'생각했는데
지금은 사람과 부대끼지 않고 조용히 약을 포장하는
약사가 제일 부럽다.
참 모를 일이다.
나도 이렇게 변하는구나.
진짜 이러다 그만두는 건가.
가만히 있으면 회복되려나.
뭘 어떻게 해야 하지.
2월 받은 학생 명렬표에
다윤이만 아빠 이름이 없다.
사실 1학년때 만들어진 명렬표라 다른 아이들도 가족 구성원에 변화가 생겨도
직접 말하지 않는 한 졸업할 때까지 잘 모른다.
아니면 누락된 걸 수도 있다.
3월 학생 기초조사서에도
정보가 없는걸 보니 다윤이는 한부모 가정이다.
그래도 요즘은 이혼한 걸 숨기는 가정이 많은데
숨기지 않음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3,4월 다윤이는 쉬는 시간 내 주변에서
엄마, 아빠와 함께 보낸 이야기를 종종 했다.
"우리 아빠랑~"
"우리 아빠는요~"
나는 마치
"선생님~ 저 아빠랑 엄마랑 이렇게 잘 지내요~"로 들렸다.
숨기고 싶구나.
선생님이 몰랐으면 하는 거구나.
그래 알겠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6월, 매일 한 명씩 아이들과 급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밥 데이트'란 이름으로 하는 '상담'이다.
오늘은 다윤이와 함께 밥 먹는 날이다.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다윤이는 이야기를 주도한다.
내가 오히려 "응, 그래"대답을 하고 있다.
그런데 한참을 쫑알거리던 다윤이가
"사실은..."
"저희 엄마, 아빠가 이혼을 했거든요."
갑작스러운 고백이다.
다윤이가 나에게 말하고 싶었구나.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 걸까.
내 도움이 필요한 건가.
꽁꽁 숨기고 싶었던 이야기를
어떤 마음으로 열게 되었는지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받아줬다.
다윤이 마음이 한 결 가벼워졌길 바랐다.
그래 오늘
내가 좀 더 여기에 있어야 할 이유가 생겼다.
10살 아이가
숨기고 싶었던 자기 이야기를 터놓는 순간
내가 여기
학교에 있을 이유가 생겼다.
"선생님, 잘 계시죠?"
"요즘 어때? 힘들제?"
"네, 그러네요. ㅎㅎ"
"00야, 애들한테 잘해줘라.
애들도 겉은 멀쩡해도 마음이 아프거나 사연이 있는 애들이 분명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