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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아리 Aug 31. 2024

내가 너를 공부시키는 이유 3

안 하면 얻는 게 없어

학창 시절 내 성적표에는 늘 이 문구가 있었다.


[발표력을 길러야겠음]


방학식날마다 이 문구를 본 엄마의 한 마디

"발표를 왜 안 하노. 발표 좀 해라"


초등학교 6년, 중고등학교 6년 동안 손을 들어 발표해 본 기억이 없다.

그냥 수업 시간에 목소리를 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나는 'I'이다. 주목받는 걸 썩 좋아하지 않는다.

귀찮기도 했고, 선생님도 발표를 시키지 않았다.


그렇게 편하게 12년을 살다 대학을 가서 '발표'라는 난간에 봉착했다.

빡빡하기로 소문난 교수님.

그분은 개강하는 날 책 한 권을 준비시키고 다음 시간에 어디까지 읽어오라고 하셨다.


그리고 첫 수업시간.

"50쪽까지 읽었지? 읽고 나서 어떤 생각이 들었어?"


누가 번쩍 손을 든다.

'음. 생각보다 편한 수업이 되겠구나.' 하며 친구의 발표를 음미하고 있었다.

그런데 친구의 발표가 끝나자 교수님의 말씀에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다음. 그 옆에 말해봐."


'이건 뭐지. 지금 강제로 발표를 시키는 건가? 이 순서대로라면 다음다음이 나인데. 큰일 났다.'


손에 땀이 나고 다음 친구의 발표 내용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12년을 남 앞에서 내 생각을 말해 본 적이 없다.

내 차례가 되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내 목소리는 매우 떨렸던 것만 기억난다.


화요일 교수님 수업이 있기 전 월요일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았다.


[그게 뭐라고 그 정도까지...]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남 앞에서 내 생각을 말하는 것, 그리고 모두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장면을 스무 살이 넘어 경험하는 나로서는 너무 낯설고 두려웠다.


그런데 인간의 적응력은 무섭다.

나는 더 책을 열심히 읽었다.

혼잣말로 내 생각을 정리하고 말하면서 수업을 준비했다.


1년의 트레이닝은 나를 변화시켰다.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친구들과

내 생각에 공감과 미소를 보여주는 교수님의 모습은 나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훈련으로 다져진 발표에 있어서의 자신감은

2학년 교양수업, 100명 앞에서 조 대표로 여유롭게 발표하는 결과를 낳았다.


수업 시간만 되면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두근거림과 식은땀.

수업 전 날

도망치고 싶은 소심함을 이겨낸 것이다.


그리고 신규교사 시절

200명 선배님들 앞에서도 떨지 않고 발표를 해냈다.

한 선배님은 그런 나를 보며

'김연아의 심장을 가졌다'고 하셨지만

아니요.. '김연아의 심장으로 키운 겁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교수님은 내가 발표에 극도로 불안감을 느끼고 있음을 알고 계셨다.

떨리는 목소리.. 모르면 그게 더 이상했다.  

그러나 부딪히게 해 주셨다.

그래서 더더욱 내 이야기에 몸을 기울여 들어주시고

일부러 칭찬도 해주셨던 것 같다.

하기 싫은 걸 피하지 않게 해 준 교수님과

나 스스로 어려움을 극복한 대가는

더 많은, 더 좋은 기회들을 만나는 해주었다.

그땐 그 교수님이 정말 싫었는데

지금은 그 빡센 교수님께 감사하다.

(이래서 사람은 오랜 시간이 지나고 평가를 받아야 하나 보다)


나는 욕심 많은 빡센 엄마다.


좀 더 난이도 높은 수학문제집 풀기

좀 더 두께가 있는 책 읽기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스스로 책을 찾아보며 복습하기

교과서 수록 도서 미리 읽어보기 등

지금 내가 아이에게 해보자고 내미는 것 중 아이가 반기며 좋아하는 건 하나도 없다.


물론 꼭 반드시 해야 하는 필수공부는 아니지만

정성과 애씀이 필요한 공부이기에

하기 싫어도 해냈을 때 얻어지는 성취감과 자신감은

매우 가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징징 거리는 아이를 보며

수백 번도 튀어나오려는

"하기 싫어? 그럼 하지 마."라는 말을 참아낸다.  

대신

"일단 해보자. 해보고 그래도 하기 싫거나 불필요하면 하지 말자."라고 말한다.

해보고도 아이가 싫다면 안 하면 되는 거다.


"엄마, 나 오늘 발표했는데 칭찬받았어."

"뭐라고 했는데?"

"말랄라 있잖아. 국어 시간에 나왔거든. 근데 내가 책을 읽었잖아. 그거 발표했거든.

선생님이 책 읽어서 말랄라에 대해 많이 안다고 칭찬해 주셨어."

"그래? 기분 좋았겠네?"

"응 그 책 읽기 잘한 거 같아."


해보지도 않는 것과

해보고

필요한 지, 아닌지

좋은 지, 안 좋은지를 판단해보는 것은

엄청난 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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