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고
6학년 우리 반은 주 3회 독서 노트 숙제가 있다.
어떤 강력한 책임과 벌칙을 가져와도 10명 중 3명은 진. . 짜. . 안한다.
내가 딴 건 몰라도 너희 책 읽히는 건 포기 못하겠다! 그런데 나는 못하겠다.
그렇게 '독서팀'이 생겼다.
3명의 독서팀원.
이 친구들이 독서노트 관리를 하며 거짓말처럼 절대 뜻을 굽히지 않을 것 같던 그 1/3도 숙제를 하게 되었다.
왜일까?
독서팀이 독서노트를 해오게끔 규칙을 만들고, 그에 따른 벌칙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1. 독서노트는 주 3회 쓴다.
3회를 채우지 못한 친구는 금요일 청소 시간, 그 친구들만 3분간 교실 청소를 한다.
그러나 '그냥 안 쓰고 청소하지 뭐.' 하는 마음을 가진 친구가 발각되어 독서팀에서 매우 노여워했다. 더 고난위의 다른 규칙을 논의 중이다.
2. 1회 노트 양은 세 문장 이상으로 상대방이 알아볼 수 있는 글씨로 써야 숙제로 인정된다.
책 속 문장을 그대로 베껴 쓰는 친구들이 많다. 꼭 생각과 느낌을 담아야 하고, 독서팀이 알아보지 못하는 글씨는 인정하지 않는다. 내가 1년 내내 속끓였던 민성이의 글씨를 독서팀이 단숨에 고쳤다. 신기하면서도 허무하다.
3. 독서노트는 아침 독서 시간이 시작되기 전인 8:40분까지 독서팀 3명에서 제출해야 인정된다.
시간을 어기면 받아주지 않는다. 방송부원 하율이는 등교하면 방송실로 갔다가 아침 독서 시간 전에 교실로 올라오곤 했는데 언젠가부터는 교실에 먼저 와서 독서 노트를 독서팀 책상 위에 '휙'던져놓고 방송실로 간다. 한 아이의 등교 루틴을 바꾸었다.
이 모든 내용은
학급 회의에서 토의와 토론을 거듭하며 만든 규칙이며, 이 규칙은 이내 강한 법이 되었다.
나에게도 이 독서팀은 지금까지 만난 학생자치팀 중에서도 단연 최고다.
독서노트 확인은 귀찮아하거나 게을리 하지 않는다.
월요일 아침엔 도서관에 가서 친구들에게 추천하는 책이나 교과 수록 도서를 대출해온다.
또 한 달에 한 번은 다 같이 한 권의 책을 읽고 퀴즈를 맞히는 '독서 골든벨' 이벤트도 자체적으로 연다.
이렇듯 합의된 규칙과 책임자의 성실함은 좋은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러나
좋은 시스템은 권력이 되어 자신들의 입지를 다지고, 힘을 키우는 부작용이 되기도 한다.
담임인 나는 그 힘이 넘치지 않게 늘 지켜보며 아이들의 힘겨루기를 조율해야 했다.
3교시 쉬는 시간, 교실 한 켠에서 싸우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선생님, 나영이가 제 독서노트를 안 받아줘요."
"선생님, 수진이 3교시에 왔잖아요. 받아줄 수 없어요."
"나영아, 수진이 아침에 병원 갔다 왔잖아."
"그건 수진이 사정이죠!"
우리 반은 순간 모두 얼음이 되었다.
'아. 이건... 뭐지!'
수업 시작 종소리, 이대로 수업을 하긴 어려웠다. 긴급회의 시간을 가졌다.
긴급회의는 반장이 진행하기로 했다.
"예외를 두면 안 됩니다. 그럼 계속 규칙이 잘 지켜지지 않고, 예외 상황을 만들려고 하는 사람도 생깁니다. 다."
"그래도 수진이는 병원을 다녀오는 특수 상황이었습니다. 독서노트를 받아주어야 합니다. "
"오늘 독서노트를 안 받아주면 저는 오늘 한 번 때문에 청소를 해야 합니다."
"그럼 월화수목 4일 동안 독서노트를 했으면 되잖아요."
"금요일에 내는 건 내 마음이죠. 내가 오늘 아플 줄 몰랐죠."
"자기 몸 관리는 자기가 잘해야죠."
오고 가는 말들이 보고 있는 담임 마음을 콕콕 찌른다.
아이들 표정은 어떨까. 둘러보니 의외다. 은근히 재밌어하는 표정으로 잘 듣고 있다.
"자기 몸 관리는 자기가 잘해야죠."
나라면, 너무 서럽고 서운해 눈물이 날 것 같은데 수진이 표정을 보니 아~~ 무렇지도 않다.
'아. 이건... 뭐지!'
멈추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듣고 있자니 (나 혼자) 화가 났다.
"이게 뭐야. 너희 무슨 이런 말들을 주고받는 거니!"
'아. 이건... 뭐지!'
'이 느낌은 뭐지...'
나만 흥분했다.
'선생님 왜 화났지?' 하는 표정이다.
당황한 나머지 그 뒤 내가 했던 말과 어떻게 정리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마지막에 그 둘에게 포옹을 하라고 한 장면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점심 시간,
4교시 그 무서웠던 분위기는 나만 기억하는지
아이들은 매우 즐겁다.
잘들 논다.
그래도 난 불안하다.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2round가 펼쳐질까 내 레이더는 나영이와 수진이에게 집중된다.
지금 저 둘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놀고 있다.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진다.
누구도 그 거친 말들 속에서 상처받지 않았다.
이야- 세다.
강한 아이들이다.
우리 어른들이 못했던, 못해내서 아직도 괴로워하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를
'뒤끝 1도 없음.'을
지금 아이들은 하고 있다.
오늘도
우리 반 분위기는 좋다.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를 고발한다.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잘잘못을 따진다.
그러나 누구 하나 상처받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 반 분위기는 좋다.
너희가 그 알파세대구나.
정말 신선하다.
그런데 너희 정말 괜찮니?
"김선생님, '학부모 설문 통계'선생님만 아직 제출안했어요. 기한 좀 지켜주세요. 선생님때문에 전체 보고가 늦어졌어요." 그러했지만! 학년 협의회 때 서로 장점찾아 칭찬하며 차 마시기
"교장 선생님, 저번에는 이렇게 하자고 하셨잖아요. 계속 생각을 바꾸시니 너무 힘듭니다." 그러했지만!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서로 방긋 웃으며 인사 나누기
알파세대, 너희 20년 뒤엔 저런 모습이 일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