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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불라 라사

by 유바바

너희들은 하얀 종이여라! 인간의 본성은 비어있는 서판, 후천적 경험으로 완성되어갈 너희들의 마음과 지성. 나에게 주어진 붓 한 자루. 무슨 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서툴렀던 선생님의 고백. 야단 너무 많이 쳐서 미안하다. 도덕적인 척해서 미안하다. 울지 않는 것처럼 보여 미안하다. 모든 것을 아는 양 잘난 척해서 미안하다. 나는 어쩌면 너희들보다 더 비도덕적이었고, 더 몰랐고, 잘나지도 못했단다. 그래도 <화살과 노래>라는 롱펠로우의 시처럼 나라는 점 하나 너희들 마음에 콕 찍어놓았길. 수많은 수업 시간 함께 하면서 거친 세상을 헤쳐나갈 용기 한 줌 그려 넣었길,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줄 아는 사랑의 씨앗 하나 마음에 심어놓았길, 파란 가을 하늘 보며 웃을 수 있는 여유 한 점 새겨 놓았길 바라.

그리고 나의 하루는 간절했다는 걸. 수업에서 마주한 너희들의 얼굴, 화사하게 피었으면 했다는 걸. 그러기 위해 수없이 많은 낮과 밤을 연구로 보냈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해. 수업 시간 재미있는 게임과 유머를 찾기에 바빴고 드라마를 보면서도 사회 개념을 어떻게 연결시켜 볼까 고민했다는 걸 너희들은 알까. 수업 시간 어설픈 성대모사에도 박장대소해준 너희들에게 고맙다는 말 하고 싶어. 그래도 정말 고마운 건 나를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키팅 선생님이라고 말해준 것이야. 기성세대에 순응하고 기존의 질서에 편승해서 진리와 진실을 제대로 보기를 게을리하지 말라는 나의 겉멋 든 교육철학을 영화 속 그렇게 멋진 인물과 같이 봐줘서 고마워. 그리고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는 게 있어. 자율학습 도망갔다고 다음 날 엉덩이 때린 거 미안해. 아니 그것보다도 대역죄인처럼 혼낸 게 더 미안해. 대한민국 형사법 어느 조항에도 없는 죄를 말이야. 아무 반항 없이 선생님 말에 반성해주던 너희여서 더 고마워. 이렇게 말하고 보니까 나는 참 나쁜 선생님이다. 도덕적 위선과 센 척으로 나쁜 질서에 편승하여 너희를 몰아붙였구나! 그래도 이것만은 정말 알아줬으면 해. 그 모든 순간, 너희를 사랑하지 않은 순간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는 걸. 그리고 문득문득 너희가 지금도 보고 싶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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