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타인의 뒷모습이 내게 걸어오는 말 네 번째 이야기
은밀한 장소가 필요해
내가 연재하는 글의 주제는 출근길 뒷모습이다. 그러나 오늘은 볼 수 없는 뒷모습과 닿을 수 없는 뒷모습으로 인해 벌어진 재난상황을 알리려 한다. 재난상황이란 표현은 문학적 과장이 아니다. 정말 재난상황이다. 왜냐하면 내 뒷모습이 큰 곤란에 빠졌는데 통제할 방법도 해결할 방법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근본적 해결을 위해서는 재난상황을 송두리째 날려버릴 수 있는 나만의 은밀한 장소가 필요했다. 그러나 출근 인파에 갇혀 있는 나는 지금 은밀한 장소를 가질 수 없다. 은밀한 장소를 갖기 위해서는 거친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출근지로 달려가고 있는 내 관성에 브레이크를 걸고 다른 방향으로 탈선을 해야만 한다. 재난상황이니 탈선하는 게 뭐 그리 대수냐 싶겠지만 또 이 재난상황이 통제 가능할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기도 어려운 재난상황이기에 나는 탈선을 결정하기 전에 몇 가지를 시도해보았다.
그래 다음 역에서 무조건 내리자
첫 번째, 명상을 시도해봤다. 숨을 천천히 들이쉬고 내쉬면서 나에게 온 재난이 천천히 가라앉기를 기다려본다. 아.. 젠장.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더 코끼리를 생각하게 된다더니. 명상을 할수록 이 재난은 더욱 선명하고 분명하게 강력하게 감지되었다.
두 번째, 어깨 죽지를 앞뒤 위아래로 움직이면서(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지 않을 정도로) 재난에 맞서 싸워보려 했으나 언발에 오줌을 눠 본 적 없는 자로서 그것 보다도 더 쓰잘 때기 없는 몸부림이라는 자각 속에 좌표를 정확하게 알 수도 없는 그 재난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세 번째 지극히 반듯하고 부드러운 전철 의자 등받이가 이 재난을 해결해줄 수 있을까 기대하며 좌표도 불분명한 재난이 벌어진 현장과 전철 의자 등받이 사이에 드라마틱한 마찰력을 기대해보았으나... 아.. 나 지금 뭐하니? 말이 되냐?
네 번째 재난현장에 미친 듯이 닿고 싶으나 닿을 수 없는 좌절감에 결국 그 좌표에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거리에 존재하는 뒷목을 잡고 괜히 긁적여보는 것으로 작은 위로를 던져보려 했으나 세상살이 때로는 위로가 얼마나 허망할 수 있는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결국 다음 역에서는 반드시 내리겠다고 결심하며 지금 내가 진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면 뭘 하고 싶은지 상상해보았다. 그래그래. 당장 몸 위로 겹겹이 쌓여있는 옷들을 다 벗어던지고 옆 사람에게 등을 내밀며 “피나도 괜찮으니 손톱 세워서 제 등 좀 여기저기 박박 긁어주세요.....?????” 아... 진짜. 나 뭐하니... 그래. 다음 역에서 무조건 내리자.
모든 근심이 사라지는 희열을 맛보다
출입문이 열리고 나는 한 번도 내려본 적 없는 낯선 지하철역에서 빛의 속도로 화장실을 찾아 뛰어들어갔다. 은밀한 공간을 드디어 확보했다. 가방을 내려놓고 외투를 벗어서 걸고 참고 참았던 분노를 담아 거침없이 재난 상황을 소탕했다. 세상 모든 근심이 다 사라지는 희열 속에서 다짐했다. 다음에는 미련하게 참지 않으리라. 지금 출근이 중요한가? 남의 뒷모습 따위가 중요한가. 내 등에서 벌어진 일을 잘 돌보는 일이 훠어얼씬 중요하다.
우리 모두의 위대한 출근을 응원한다
그렇게 재난상황을 해결하고 또 씩씩하게 출근지를 향해 출발했다. 때로는 출근을 해서 뭘 하느냐보다 출근을 하는 것 자체가 위대한 날이 있다. 그날이 그런 날이었다. 우리 모두의 위대한 출근을 응원한다.
ps. 가족들은 내 이야기를 듣더니 여행 중 전라도 어디 장터에서 사 온 효자손을 가방에 넣고 다니라는 조언을 해줬다. 우리는 전철 안에서 누군가가 느닷없이 가방에서 효자손을 턱 꺼내더니 속 시원하게 뒷덜미로 밀어 넣고 부지런히 업 앤 다운 운동으로 등에서 벌어진 재난상황을 소탕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함께 웃었다. 그래. 이 재난이 가져다준 선물로 이 정도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