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퇴근길 누군가의 뒷모습이 나에게 걸어오는 말 세 번째 이야기
“다음 역은 서대무우운~ 서대문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1시간 전철 여행이 끝나간다. 문이 열리기 전 언제나 그렇듯 약간의 긴장감과 피로감에 사로잡힌다. 곧 전철문이 열리면 사람들은 쏟아져 내려 계단을 향해 거침없이 돌진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다르다. 그 무리에 합류하기 전에 고민이 많단 말이다. 우선 "너 같은 사람 웬만하면 타지 말라고 쫌!"으로 읽히는 엘리베이터 안내문을 보면서도 내가 장애인과 노약자와 교통약자 어디쯤에 분명 위치할 거라는 생각을 제법 진지하게 하는 편이다. '얼마 전에는 다리를 다친 적도 있고.. 내 발목과 무릎은 지구가 나를 끌어 당기는 중력(이라 어렵게 쓰고 몸무게라 읽는다)을 감당하기에는 늘 벅차고... 계단을 걷는 건 내 정신건강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고... 그러니 종합적으로 생각해보면 나는 교통약자가 분명하고....’ 등등. 그러나 곧 지팡이를 쥔 반백발의 허리가 굽은 어르신들에게 둘러싸여 유난히 천천히 움직이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꽤나 느릿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걸 상상하면서 나는 마음을 바꿔먹는다. 그래! 오늘 하루도 저 높디높은 계단을 씩씩하게 오르며 경쟁적으로다가 열정적으로다가 열심히 살아보자! 그렇게 마음을 달래며? 아니 몸을 설득시키며 전철에서 내린다.
그렇게 계단 걷기에 합류하기로 결정했으나 시작부터 킹 받는다. 첫 계단에서 내 눈에 펼쳐지는 풍경은 계단 벽에 반듯하게 줄줄이 붙어있는 글이다. 계단 한 칸을 오를 때마다 몇 칼로리가 소모되고 수명이 몇 분이 늘어나서 세상에서 돈 안 드는 가장 좋은 운동이 계단오르기라는 글. 그거 말이다. 그러나 그 글 때문에 킹 받는다고 몰려오는 사람들 속에서 뒤돌아 다시 엘리베이터로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그래? 그렇게 건강에 졸라 좋은 계단 너나 많이 걸어라. 아침부터 전철에서 1시간 동안 서있다가 계단 걸어봐라. 사는 게 얼마나 피곤한지 너가 알기는 하냐?’라며 계단 벽이란 무생물을 향해 구시렁거리며 계단을 오른다.
그렇게 칼로리 어쩌구저쩌구 하는 계단을 올라서면 개찰구로 향하는 꽤나 가파르고 높은 계단이 눈앞에 펼쳐진다. 여기서부터는 정확한 기조를 가지고 세 가지 선택지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해서 줄을 서야 한다.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기. 에스컬레이터 타고 걸어 올라가기. 에스컬레이터 타고 서서 가기. 선택지는 세 가지이지만 실제로 나는 늘 두 가지를 놓고 고민한다. 에스컬레이터에서 걸어갈지 서서 갈지. 만약 그날 전철에서 운이 좋아 앉아서 왔고 가방도 가볍다 하는 날은 걸어서 올라간다. 그런데 내내 서서 온 데다가 가방도 무겁다 하면 서서 올라간다. 내 선택지에 계단을 오르는 건 없다. 에스컬레이터가 망가진 날만 빼면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놀라운 풍경을 목격했다. 그 사람은 정장 차림에 코트를 입었고 긴 머리를 멋지게 스타일링했고 메이크업도 너무 튀지 않는 선에서 완벽했는데 하이힐을 신고 (보통 몇 cm 굽을 하이힐이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기준으로는 완전 하이힐) 오른쪽으로는 핸드백을 메고 왼쪽으로는 분명 노트북이 들어있으리라 추정되는 가방을 메고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와... 저건 도대체 뭐지? 리스펙인데!!????'라고 말하려다가 저 광경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면 안된다는 목소리가 내면에서 들려왔다.
저렇게 옷 입고 화장하려면 수면 시간을 얼마나 줄여야 하는 걸까? 정장 차림으로 하이힐을 신은채 노트북 가방을 메고 계단을 오르는 건 인간의 몸에 저질러도 되는 합당한 행동인가? 무엇보다 저렇게까지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러 질문들이 뒤따라 들려왔고 십원짜리 동전보다 작은 면적의 하이힐 뒷굽으로 버티는 삶의 무게를 바라보고 있자니 계단을 걸으면 좀 더 오래 살 수 있다는 계단 벽의 말들이 그렇게 열심히 살면 오래 살지 못한다는 말로 바뀌어야만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제발 좀 특별히 겁나 열심히 살아야 되는 날이라면 자기 몸을 돌보기 위해서라도 엘리베이터를 타면 좋겠다. 만약 그런 차림이 일상이어야한다면 에스컬레이터라도 좀 탔으면 좋겠다. 아니면 누가 뭐라든 편한 신발을 신고 출근했다가 필요할 때만 하이힐을 신었으면 좋겠다. 아름다움이란 기준에 맞추느라고 자기 몸을 불필요한 고통에 빠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덜 열심히 사는 사람 보기에 겁나 괴상하다.
그렇게 그에게 직접 전하지 못하는 많은 말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고 나는 오늘도 인생을 살아가는 각오와 기세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그 계단 앞에서 오늘은 얼마나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사람들은 어떤 삶의 무게를 감당하며 계단을 오르고 있을까 바라보며 출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