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개학을 손꼽아 기다리며
나는 종종 교사를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일어나 화장실 거울 속 내 모습을 볼 때면 언제까지 이렇게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장소에 가서 같은 일을 하다가 같은 시간에 나오는 삶을 살아야 하나 숨이 막히곤 했다. 또 봄, 가을 세상이 자기 아름다움을 정신 없이 뽐내는데 교실에 갖혀 창문 너머로 멋진 햇살과 꽃과 단풍을 바라봐야 할때면 봄, 가을을 즐길 수 있는 직업을 갖고 싶었다.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아이와 학부모를 만나서 두손 두발 다 들고 싶은 심정인데 훌륭하게 잘 감당 해야만 한다고 내 내면의 소리가 나를 괴롭힐때면 이런 고민 안해도 되는 일이 부러웠다. 그리고 마음 한쪽에서는 늘 딴생각이 있었다. 아마도 교사보다 훨씬 신나고 재미있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평생 이 일만 하다 죽으면 어쩌나 하는 딴생각.
이런 나는 개학이 한주 미뤄졌을 때 뜻하지 않는 휴가를 얻은 것처럼 좋았다. 일주일정도 늦잠도 자면서 여유 있게 아이들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있겠구나 싶어 반가웠다. 그러나 다시 2주가 미뤄지고 나니 마음이 딱 불편해졌다. 난 지금 교실에 있어야 한다. 쉬는 시간이면 아이들이 내 옆에 다가와 종알거려야 하고 나는 아이들에게 수업시간에 딴 짓 하지 말아라 뛰지 말아라 친구에게 친절해라 잔소리를 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둘러보면 집에서 덩그러니 멍하니 앉아 있는 학교에 가지 못하는 나만 있었다.
책상 위에는 아이들과 함께 읽으려고 했던 [푸른사자 와니니]가 있었고 두해 전 이 책을 함께 읽으며 아이들과 웃고 울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아이들이 힘들어하면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아이의 삶을 지지해주고 싶어 했던 내 마음이 떠올랐고 무엇보다 학교 안을 같이 걸어다니며 하루 하루가 다르게 피어나는 꽃들을 바라보고 감탄했던 수많은 봄들이 떠올랐다. 그런데 나는 그곳에 갈 수 없고 그곳에 가도 아이들은 없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봄맞이를 빼앗긴 나는 2월 28일이 계속 반복되는 시간에 갖혀 있었고 아이들이 없는 학교에 꽃이 피는건 반칙이라고 아이들이 오기 전에는 꽃이 피어서는 안된다고 봉긋 솟아오르는 꽃들을 바라보며 얼토당토 않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나는 힘들다고 아무에게도 대놓고 말할 수 없었다. 길어지는 사회적 거리두기 속에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만 갔고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일하지 않는 교사의 월급을 삭감해야 한다는 청원이 끊임없이 올라오고 교육청에서는 재택근무 하면서 뭐라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이라 하고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는 임금차별이라 불편해하고....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교실에 아이들이 없다고 봄을 잃었다고 징징댈 일이 아니구나. 조용히 있어야겠구나. 나는 지금 어디가서 힘들다고 말할 일이 아니구나.
그리고 3월 17일. 개학 연기 2주가 또 발표되었다. 나는 그날밤 미친 듯이 몰려오는 복통으로 잠을 깼다. 위경련이었다. 몸이 나에게 신호를 보냈다. “힘들다고 말하면 안된다고 강요하지마! 너 지금 안괜찮아!” 맞다. 나는 코로나에 걸린것도 아니고 먹고 살 걱정으로 막막한 것도 아니고 그럭저럭 이 힘든 시간을 수월하게 건너고 있는 사람인건 분명하지만 교사로서 나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수업도 하고 싶고 아이들이 성장하는 한 시기를 잘 건널 수 있도록 안내하고 격려하고 싶다. 아이들이랑 싸우고도 싶고 말 안 듣는 애들 째려 보고도 싶고 내 맘 알아주는 아이들 예뻐도 하면서 그렇게 학교에 가서 노동자로서 내 존재를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가고 싶다. 나는 아이들 속에 있고 싶다.
그러니 코로나야. 이 시간동안 내가 이 일을 얼마나 잘 해보려고 애썼는지, 즐거워하고 보람을 느꼈는지, 힘들어도 자긍심을 느꼈는지 그리고 아이들을 돕는 것을 얼마나 기뻐했는지 충분히 깨달았으니 이제 그만 좀 물러가라. 나 정말 온라인 개학 같은거 말고 학교 가서 아이들과 함께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