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육은 삶의 전 과목을 다루는 곳입니다

교육 현장 르포 <학교 선생님 편 4편>

by 조영철

핵심 질문: 지금의 공교육 시스템에서 선생님들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지난 장에서는 왜 '명 선생'이 공교육에서 필수적인 존재인지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그 명 선생이 활동하게 될 학교라는 공간, 곧 공교육 시스템 자체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함께 고민해보려 합니다.



공교육과 사교육, 같은 듯 다른 두 세계

많은 분들이 "공교육은 학교, 사교육은 학원"이라고 단순하게 구분하십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이상의 깊이를 묻지 않는 데 있습니다. 학원이 추구하는 목표는 명확합니다. 점수, 더 높은 점수, 그리고 최대한 빠른 성적 향상. 교재도, 커리큘럼도, 강사의 열정도 모두 이 한 줄기 목표로 수렴됩니다.

반면 학교는 어떠해야 할까요? 제 친구 민수는 "학교도 솔직히 점수 올리려고 다니는 곳 아닌가요?"라고 되묻습니다. 저 역시 한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시야를 넓히면 학교는 점수로 환원할 수 없는 것들을 품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가치관, 사회성, 실패를 견디는 법, 타인을 배려하는 감각. 공교육은 원래 ‘삶의 전 과목’을 다루도록 설계된 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 그 사실을 잊어버렸을까요?



공교육이 사교육을 따라가기 시작한 날들

이야기의 첫 단추는 입시입니다. 〈좋은 대학 = 성공〉이라는 공식은 우리 사회의 만년 교과서입니다. 학교도, 선생님도, 학부모도 이 등식 앞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학교장은 대입 실적을 보고 받고, 선생님들은 진학률로 평가받습니다. 결국 교실은 점점 학원 교실을 닮아갑니다. 국어 시간에는 소설의 감정선을 이해하기보다 지문 스캔 속도를 겨루고, 윤리 시간에는 가치 갈등을 토론하기보다 암기 팁을 공유하게 됩니다.

아이들은 말합니다. "이럴 거면 차라리 학원 창문 없는 반에 앉아 문제만 더 풀고 싶어요." 공교육이 사교육을 베끼는 순간, 학생의 마음도 학교에서 멀어집니다.



교권의 그림자 ― 선생님도 지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교권 약화입니다. 저는 중학교 때, 학생과 교사가 책상 모서리를 사이에 두고 ‘학부모 민원’을 놓고 실랑이를 벌이던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날 이후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질문을 던지지 않으셨습니다. 말 한마디가 민원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교사가 침묵하자, 학생도 침묵했습니다. 교실에는 오직 칠판과 분필 소리만 남았습니다. 존중이 사라진 자리에는 무관심이 자리 잡습니다. 무관심은 다시 학교의 존재 이유를 흐릿하게 만듭니다. 악순환입니다.



공교육이 사라지면 무엇이 비어 있을까요?

입시 성적만 보고 학교를 ‘효율 낮은 학원’이라 부르는 학생들에게 저는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입시가 끝난 뒤, 여러분을 지탱해 줄 것은 무엇일까요?"

대학에 합격증을 받은 날, 반짝이던 공부법 노트는 순식간에 빛을 잃었습니다. 남은 것은 관계, 가치, 그리고 스스로를 믿는 힘이었습니다. 이것들은 ‘정답 ×’이라고 줄을 그으며 얻어지는 것들이 아닙니다. 수업이 끝난 후 복도에서 나눈 대화, 동아리에서 꾸민 전시, 수행평가를 함께 준비하며 생긴 우정. 공교육이 사라지면 이런 층위의 경험도 함께 사라집니다.



선생님들은 ‘삶 디자이너’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공교육을 되살릴 열쇠는 결국 선생님에게 있습니다. 교사는 성적을 넘어 학생의 삶을 디자인하도록 초대받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강점 탐색자 ― 학생이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을 찾아내어 연결해 주는 안내자


실패 코치 ― 시험에서 미끄러진 경험을 성장의 재료로 바꾸는 법을 가르치는 조력자


가치관 중재자 ― 토론과 프로젝트를 통해 ‘나는 왜 이 길을 가려고 하는가?’를 묻는 질문자


점수는 사교육이 훨씬 빠르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위해 배우는지를 묻는 일은 교사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도 ‘수동적 소비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모든 책임을 선생님에게만 돌릴 수는 없습니다. 학교를 서비스 기관으로 대하는 학생들의 태도도 바뀌어야 합니다. 질문은 눈치 보는 일이 아니라 수업을 완성하는 재능입니다. 비판은 무례가 아니라 공동체를 단단히 만드는 재료입니다. 공교육은 교사와 학생이 공동 제작하는 작품입니다. 관객석에서 야유만 보내서는 새 이야기가 시작될 수 없습니다.



사교육과 공교육, 서로 다른 두 기둥 세우기

정리하자면, 사교육과 공교육은 각각 다른 기둥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사교육이 점수를 높여 주는 ‘엘리베이터’라면, 공교육은 인생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여야 합니다. 엘리베이터는 빠르지만 좁습니다. 전망대는 느리지만 넓습니다. 우리는 두 공간의 차이를 또렷이 의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학교는 애매한 학원이 되고, 학원은 더 커진 학교가 되어 버립니다. 그 결과, 어느 곳에서도 ‘사람’을 찾기 어려워집니다.



교실 안에서 시작할 작은 실험들

변화는 거창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등학생 시절 저는 동아리 활동 중 ‘말하지 못한 말을 붙이는 나무’를 만든 적이 있습니다. 친구에게 직접 말하기 애매하거나 말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포스트잇에 적어, 칠판에 그려진 나무 그림에 붙이는 활동이었습니다.

싸웠거나, 어색해졌거나, 멀어진 친구에게 건네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그 나무에 담겼습니다. 2층 구석에 있던 그 나무를 일부러 찾아와 조용히 글을 붙이고, 그것을 통해 서로 말을 잇는 장면들도 있었습니다.

코로나로 멀어진 관계를 이어주는 역할도 했고, 학업과는 무관했지만 학생들의 마음에 잔잔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학창 시절이 끝난 뒤에도 그 경험은 오래 남았습니다. 이런 경험이 한 해에 한두 번이라도 더 늘어난다면, 공교육은 학원과 다른 색을 분명히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입시 이후’를 상상하게 하는 수업이 필요합니다

저는 지금도 고3 교실의 공기를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칠판에 적힌 대학 이름, 벽에 붙은 의대 합격 인원, 복도마다 돌아다니는 모의고사 등수표. 그 안에서 ‘입시 이후’의 삶을 상상하는 일은 금기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결국 누구도 시험지 위에서만 평생 살 수는 없습니다. 교실이 ‘시험 이후’를 연습하는 공간이 될 때, 공교육은 다시 빛을 얻습니다. 인문학 서클이 열리고, 창업 동아리가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정신건강 주간이 진지하게 운영되는 학교. 그런 학교야말로 학원이 채워 줄 수 없는 영역을 회복합니다.



4부를 마치며 ― 다시, 학교의 존재 이유를 묻습니다

공교육은 ‘삶’이라는 거대한 과목을 담당해야 합니다. 사교육은 ‘점수’라는 날카로운 도구를 다루면 됩니다. 두 기관이 서로의 영역을 존중할 때, 학생은 둘을 균형 있게 활용해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선생님은 삶을 가르치는 교육자로, 학생은 주체적 탐구자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대단히 어려워 보이지만, 변화는 이미 작은 교실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다음 장(5부)에서는 이 변화를 구체화할 방법, 그리고 앞으로 교사가 어떤 모습으로 진화해야 하는지를 탐색해 보려 합니다. “학교는 의미가 없다”는 푸념이 “학교라서 배울 수 있었다”는 확신으로 바뀌는 그날을 상상하며, 4부의 문을 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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