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눅진함을 여행하다
(서울 기준)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고 싶지만 너무 멀리는 번거롭고, 그래도 여행 느낌을 물씬 내고 싶은 곳으로 속초만한 곳이 또 없다. 속초로 가는 길은 고속버스가 유일한데, 버스를 타고 속초터미널까지 도착하기 직전 차 안에서 감상할 수 있는 바닷가 풍경은 마치 영화 속으로 들어가 트래킹 쇼트로 찍힌 바닷가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그리고 괜히 신난다. 역시 바다를 봐야 여행 세포가 꿈틀거린다.
속초가 강원도 관광지 1세대 중 한 도시다. 그만큼 관광도시로서 역사가 긴 편인데, 부모님과 함께 속초를 와보면 예전에 비해 속초가 그렇게까지 변하지 않았다고들 하신다. 관광도시라면 관광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1년이 멀다 하고 트렌드를 반영해 도시의 모습을 세련되게 만드는 게 보통이다. 왜 관광도시 1세대 중 하나인 속초는 변화의 속도가 다소 느릴까? 며칠 속초를 돌아다니다보면 속초만의 냄새를 맡을 수 있게 된다. 수산시장의 해산물 비린내 혹은 바닷가의 소금 짠내를 말하는 게 아니다. 속초의 변화를 더디게 만드는 시간의 쿱쿱한 냄새. 속초에 가면 이 냄새를 맡아봐야 한다.
이 냄새를 좇는 나만의 속초 여행 방법은 이렇다!
아침에 서울에서 출발하면 보통 점심 먹을 시간대에 속초에 도착한다. 돌아다니려면 체력이 필수니 어떤 여행이든 밥부터 먹고 출발하는 게 이상적이다. 속초에 오면 늘 먼저 들리는 식당이 '봉포머구리집'이다. 워낙 유명한 집이라 너무 뻔한 식당을 언급한 감이 없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름값을 충분히 하는 곳이다. '봉포머구리집'에서 반드시 먹어야 하는 메뉴는 '오징어물회'다. 흔히들 물회의 3대 도시로 속초, 포항, 제주도를 말한다. 3도시 모두 각각의 물회 스타일이 있는데, 속초는 오징어회를 채로 썰어 마치 국수처럼 먹는 게 특징이다. 참고로 오징어의 제철은 7~11월이라고 한다. 대략 늦여름에서 가을 정도이다. 아무래도 날이 더울 때 속초물회를 먹어야 물회의 시원함과 청량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속초시외버스터미널에서 '봉포머구리집'까지는 걸어서 20분이 걸리니 그다지 먼 거리는 아니다. 하지만 배가 고프다. 택시를 타고 5분만에 도착할 거다. 식당에 도착해선 오징어물회와 함께 성게알비빔밥 혹은 홍게알비빔밥을 같이 시키면 어디가서 주문 못 하는 놈으로 찍히진 않는다.
봉포머구리집 바로 앞이 등대해수욕장이다. 해수욕장을 거닐며 소화를 시키자. 여행은 지금부터다.
대중교통을 타고 청초호 쪽으로 이동한다. 배를 채웠으니 마음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고서점 두 곳을 먼저 들르기로 한다. 1956년 개업한 '동아서점'과 1984년 개업한 '문우당서림'이다. 두 서점 모두 역사가 상당히 깊지만 지금은 몇 번의 리모델링을 거쳐 멀끔한 서점이 되어 고서점이란 인상은 이제 없다. 단 서점 내에 걸려 있는 몇 장의 옛날사진들을 보면 감히 나는 가늠할 수도 없는 깊은 시간이 내가 서 있는 그 땅에 새겨있다는 걸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해준다. 두 서점은 모두 일반서점과는 다르다. 비록 서점의 규모가 큰 편이긴 하지만 두 서점에서 독립출판물들을 주로 취급한다. 따라서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서점에선 볼 수 없는 책들을 이곳에선 볼 수 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아기자기한 표지로 디자인된 책들이 몰려 있는 것만 봐도 설렌다. 그리고 서점 특유의 책냄새들까지. 우리 일행은 모이는 시간만 정해두고 각자의 취향에 따라 다른 코너로 흩어진다.
서점을 자주 들르는 한 사람으로 독립출판물들은 정말 반갑고 고마운 존재들이다. 늘 똑같은 저자들과 유명한 이름의 책들이 '베스트셀러'라는 이름으로 자기 자리를 다른 책에게 양보하지 않은 경치는 이제 조금 지루하다. 독립출판물들 덕분에 아날로그 책의 생태계가 다양해지고 있다. 더불어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서점이라 그런지 두 서점들엔 여행책들이 참 많다. 나도 같은 여행객이다보니 여행책에 관심이 쏠리고 여행 코너에서 흩어졌던 일행과 마주치면 역시 여행객의 마음은 똑같구나 느끼게 된다.
이 서점들이 더 재미있는 건 강원도와 관련한 책들이 눈에 띈다는 거다. 여행을 가서 무슨 서점까지 가냐 싶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행에서 주인공은 '여행을 하는 나'가 아니라 '내가 있는 여행지 그 장소'다.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있듯이 여행 간 그 도시와 친해지고 싶어서 왔다. 우연히 들어간 서점에서 내가 친해지고 싶은 그곳에 대해 설명해주는 책들이 있다. 얼마나 반가운가! 그 순간만의 반가움과 특별한 감정 때문에 결국 지갑을 열어 책을 구매해 짐을 더 무겁게 한다. 그래도 이런 무게는 즐거움이 보태진거라 좋기만 하다. 여기에 일행을 위한 책도 슬쩍 골라서 선물해주면 서점 여행의 마무리까지 완벽하게 장식할 수 있다.
문우당서림과 동아서점은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거리다. 동아서점에서 이번엔 '칠성조선소'로 향한다. 걸어서 1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시원한 속초바람 맞으면서 걸으면 금세 도착한다. 무슨 조선소냐 할 수 있겠지만 '칠성조선소'는 과거 조선소였을 뿐 현재는 인스타감성 물씬 나는 카페로 운영 중이다. 과거 청초호 주변엔 조선소들이 정말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전부 사라지고 없지만 그 흔적이라도 엿볼 수 있는 곳은 '칠성조선소'가 유일하다.
칠성조선소는 북한 원산 출신인 최칠봉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당시 부산까지 피난을 갔다가 다시 북쪽으로 가던 중 속초에 정착 후 1952년에 문을 열었다고 한다. 고향이 원산이라 조선소의 원래 이름은 원산조선소였다가 1960년에 '칠성조선소'로 바꾸었다고 한다. 원래 속초에 살던 사람들 입장에선 탈북민들은 외지인 같은 존재들이었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환영받지 못했고 실향민들은 속초의 중심지에 거주하지 못하고 해안가 변두리에 옹기종기 모여살 수밖에 없었다. 먹고 살기 위해 나름 바닷가 경험이 많던 실향민들은 하나둘 조선소를 차려 나름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당연히 이때 조선소에서 만든 배들은 목선이었다.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목선을 만들던 조선소들도 줄줄이 문을 닫았다.
현재 칠성조선소는 최칠봉 할아버지의 손자 내외가 이어받아 운영 중이다. 이제는 목선을 만들기보단 카누나 카약을 위한 배를 만든다고 하는데 2018년부터 카페로 변한 뒤로 아직까지 레저용 배 만드는 일을 하고 계신지는 잘 모르겠다.
난 그래서 커피를 주문하면 무조건 밖에 나온다. 조선소의 흔적들을 보며 한때 기물로 사용했을 어딘가에 살짝 걸터 앉아 완성된 배들이 운항했을 청초호를 바라보며 커피도 마시고 사진도 찍는다. 세련된 카페로 완전히 모습을 바꿨지만 여전히 옛날 조선소의 폐건물들이 일부 남아있다. 심지어 그 오래 전 만들었던 목선도 전시되어 있으니 시간의 바스라짐에 묘한 감수성을 적시고 올 수 있다.
칠성조선소에서 커피를 마시며 옛날 갓 조선이 끝난 배가 운항했을 청초호를 한적하게 바라본다. '푸른 색 풀꽃 같은 호수'라니 청초호의 이름부터 몽글몽글하다. 호수의 규모가 커서 바다로 착각하기 쉽지만 엄연히 호수다. 조선시대에는 병선들도 상륙했다고하니 확실히 일반 호수와 다르긴 다르다.
비단 규모 면에서 뿐 아니라 청초호는 일반 호수와는 다른 석호의 하나이다. 석호는 바닷물이 만 안쪽까지 들어왔다가 연안류에 따라 퇴적된 모래가 들어온 바닷물과 바다를 차단시키면서 형성된 호수다. 따라서 물은 어느 정도의 염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호수의 담수가 아니고, 그렇다고 바닷물 정도의 염분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호수도 바다도 아닌 게 석호다. 석호는 연안류가 두드러지는 동해안에 집중분포하고 있고, 속초의 청초호와 영랑호가 가장 대표적인 석호다.
청초호 주변으로 개발단지가 들어서면서 청초호 일부가 매립되고 있다고 한다. 청초호 한 켠엔 철새들이 머무르는 갈대밭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 갈대밭 규모가 축소되면서 철새들의 수도 크게 줄어들고 있는 현실이다. 현재 속초의 환경단체들이 청초호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라고 하니 마음 속으로나마 응원의 힘을 보내본다.
조선소를 나와 갯배선착장으로 향한다. 다음 목적지는 속초의 첫날 일정을 끝마칠 '아바이마을'이다. 속초 여행의 가장 핵심이 되는 곳이다. 아바이마을로 가기 위해선 갯배선착장에서 갯배를 타야 한다. 칠성조선소에서 갯배선착장까지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거리다. 지금은 차를 타고 아바이마을로 들어갈 수 있는 대교가 만들어졌지만 갯배를 이용할 것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그렇게 갯배를 타고 아바이마을로 들어간다. 아바이마을을 관광지나 테마공원이라는 인식을 갖고 들어가면 무조건 실망할 거다. 아바이마을은 감정을 털어내고 분출하는 곳이 아니라 감정을 삼켜서 응축시키러 가는 곳이다. '아바이'는 '할아버지'를 뜻하는 함경도 사투리다. 한국전쟁 도중 함경도 출신의 피란민들이 갈 곳 없이 떠돌다가 정착한 곳이 아바이마을의 유래다. 속초의 위도는 38도 이북이다. 한국전쟁 전까지는 북한 땅이었다는 뜻이다. 한국전쟁을 끝내면서 새롭게 국경선을 그을 때 휴전선 이남에 속하여 대한민국의 땅이 되었다. 따라서 함경도 피난민들 입장에서야 고향과도 그나마 가장 가깝고 한때 북한 땅이었던 속초 등지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던 대로 그들은 현지인들 입장에선 환영받지 못한 외지인이나 다름 없었고 사람들이 잘 살지 않은 척박한 곳에 마을을 이루어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곳이 아바이마을이다. 아바이마을의 지도를 보면 내륙과 연결되지 않은 섬이다. 지금이야 대교가 있지만 당시 함경도 피난민들은 고립된 섬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함경도 피난민들 중 일부는 칠성조선소의 창립자 할아버지처럼 조선업에 뛰어들었지만 조선업도 상당한 기술력이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고기잡이에 종사했다. 아바이마을로 내쫓긴 함경도 피난민들은 잡은 고기를 팔거나 생필품 등을 사오려면 혹은 어떠한 이유에서든 시내나 읍내로 나오려면 이 남루한 갯배만이 섬에서 내륙으로 왕래할 수 있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실향의 아픔이란 단순히 고향을 잃었다는 사실에서 그치지 않고, 연고지 하나 없는 곳에서 그곳 현지인들에게 눈치나 받으며 불편한 생활을 해야만 하는 처지에서 실감되는 법이다.
아바이마을에서 보이는 바다는 청초호와 연결된 동해바다다. 바다 멀찍이 속초항의 등대와 청호동방파제의 등대가 가운데 바다를 두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괜한 쓸데없는 상상이지만 마치 휴전선을 가운데 두고 닿을 수 없는 남한과 북한 같다. 땅거미가 지고 하늘은 어스레해질 때 어둡지도 푸르지도 않은 하늘 아래, 아바이마을 모래사장에서 보이는 동해바다의 정조는 알 수 없는 비장미를 만끽하게 한다.
슬슬 해도 지고 배가 출출해 아바이마을 먹거리타운으로 가본다. 지금도 이 먹거리타운에선 여기저기 함경도 사투리가 들려온다. 지금 살아계신 어르신분들이 아마 마지막 피난 세대일 텐데 이 분들마저 돌아가시면 아바이마을엔 순수 함경도 출신 사람들은 사라지고 이 사투리도 더 이상 듣지 못하는 날이 오겠지.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 아바이순대를 시킨다. 피난민들이 이곳에 정착하고 남자들은 고기잡이를 통해 생계를 벌고 여자들 중엔 이북식 함경도 요리를 내는 식당을 운영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아바이순대, 함흥냉면 등 속초의 맛집하면 이북요리들이 거듭 거론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돼지 대창 안에 선지와 찹쌀을 넣는 방식의 아바이순대는 함경도식 식사스타일에 따라 명태회무침과 같이 먹는다. 순대 하나와 명태회무침을 싸서 먹은 뒤 맥주로 입가심을 하면 최고의 조합이다.
밥을 먹고 나오니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다시 갯배를 타고 아바이마을을 나와 속초중앙시장에서 닭강정을 사고 숙소로 들어간다. 여행뒷풀이를 위한 안주다. 오늘 하루 열심히 돌아다닌 나와 일행에 대한 작은 선물이자 푹 자기 위한, 말하자면 여행 첫째날의 점안식이라고 거창하게 술마실 핑계를 만들어본다.
다음날 몸을 겨우 일으키고 어제 제대로 못 봤던 속초의 양대 석호 중 하나인 영랑호를 걸어본다. 어디든 안 그런 곳이 있겠냐만 영랑호를 산책할 때 맑은 날씨가 영랑호의 경치를 좌우한다. 영랑호의 매력은 호수에만 있지 않고 그 뒤에 병풍처럼 펼쳐진 설악산의 능선까지 같이 관람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영랑호의 제대로 된 감상방식은 시선의 깊이와 폭이 모두 요구되는 셈이다. 영랑호는 신라시대에 영랑이라는 화랑이 금강산에서 수련을 마치고 경주로 가던 중 속초에 들렀다가 이 호수를 보고 반했다는 설화에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아침 겸 점심으로 코다리냉면이나 도루묵 정식을 추천한다. 해장을 하고 싶다면 코다리냉면을, 든든한 이튿날을 원한다면 도루묵 식당을 찾아가면 된다. '코다리'는 명태라는 생선을 내장 제거 뒤 반건조시킨 요리를 말한다. 생선의 고유명이 아니라 재료방법인 것이다. 코다리는 대부분 양념을 같이 해서 먹기 때문에 잘 모르고 보면 코다리임을 알아차리는 것도 힘들다. 코다리냉면은 이런 코다리를 고명으로 올리는 냉면으로 이 코다리냉면은 냉면 위에 회무침을 올려다먹는 함흥냉면에서 파생된 요리다. 단지 명태를 속초식에 따라 반건조시켜서 먹을 뿐인 것이다. 속초관광수산시장을 가보면 비단 코다리뿐 아니라 여러 반건조 혹은 건조된 건어물들이 다른 지방 시장에 비해 유독 많은 걸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도루묵은 한국 동해안 겨울철에 주로 잡히는 30cm가 조금 안 되는 생선이다. 쉽게 잘 잡히고 크지 않은 생선이라 70~80년대 동해안 서민음식이자 서민안주의 대명사였다고 한다. 도루묵은 찌개로도 먹지만 개인적으로는 구워 먹는 걸 가장 좋아한다. 원래명칭은 '묵'이었지만 조선시대 선조가 먹고는 '은어'라는 고급 이름을 하사한 뒤 몇 년 있다가 '도로 묵이라고 부르라 하라'는 어명에서 이름이 유래했다는 '도루묵'. 사실 도루묵을 제대로 먹기 위해선 속초 시내보다는 대포항이나 동명항 쪽으로 빠져야 한다.
배도 채웠으니 살짝 먼 곳으로 이동해본다. 속초시내에서 다소 외진 곳이라 속초를 놀러 온 관광객들도 그렇게 많이 찾지는 않은 곳이나 개인적으로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바로 '속초시립박물관 단지'다. 속초시립박물관 단지 한 가운데에 속초역 폐역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 설치된 속초역은 원래 동해안으로 따라 원산으로 가는 주요 역사 중 하나였다고 한다. 속초가 38선 위의 도시였기 때문에 해방 이후에도 함경도로 넘어가는 기차역으로 기능했지만 한국전쟁 이후 휴전선 이남에 속하게 되면서 점차 폐역이 되어갔다. 원산으로 갈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1978년 완전히 철거되었다가 2005년 복원하였다. 따라서 단지 안에 있는 속초역은 최대한 원래 본모습을 복원했겠지만 엄연히 새로 만들어진 경우다.
속초역을 나오면 실향민문화촌과 북방식 가옥을 구경할 수 있다. 실향민문화촌은 과거 함경도 실향민들이 아바이마을에 처음 정착했을 당시 그들의 주거환경을 그대로 재현해놓았다. 북방식 가옥은 남한에선 쉽게 볼 수 없는 개성, 평양,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식 한옥이다. 비록 실향민문화촌과 북방식 가옥들도 모두 세트로 재현했지만 이렇게라도나마 실향민들이 아바이마을에 처음으로 정착했을 당시의 상황을 상상으로만 그치지 않고 구현된 것을 보는 것 또한 의미있는 체험이다. 어제의 여행을 더 채워주는 관광이라고나 할까. 아바이마을에서 보고 들었던 어르신분들의 어릴 적 혹은 그 부모님들이 이런 곳에서 살았다는 게 소설이나 영화 속 가상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이라는 걸 꼭 되짚어보길 바란다.
실향민문화촌과 가옥 구역을 지나면 속초시립박물관이 나온다. 박물관에서는 어촌으로서 속초와 실향민 마을로서 속초가 과거에 어떤 모습이었는지 사진과 자료를 통해 더 실감나게 접할 수 있다. 어제 아바이마을에서 실공간을 체험했다면, 실향민문화촌에선 찐득한 역사의 쾨쾨함을 상상해보고, 박물관에서 현실을 자각하게 하는 코스다. 박물관은 3층까지 있고 옥상에 전망대가 있다. 이곳이 그렇게까지 유명해지지 않아 아쉬운 마음이 크다.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포스트 워 세대 전체가 현재의 대한민국을 살면서 전쟁과 실향에 대해 고민해보는 기회는 극히 드물다. 이곳에 놀러 온 순간만이라도 지금의 대한민국 그 기저에 깔린 전쟁과 실향을 한 번 쯤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속초시립박물관 단지 출입구 옆켠에 발해박물관이 있다. 말그대로 발해를 테마로 한 박물관으로, 뚱딴지 같이 왜 이곳에 발해박물관이 있는 거지 의아해할 수도 있겠다. 과거 남북국시대에 발해의 수도에서 신라의 수도 경주까지 내려가는 교통로 '신라도'가 있었다. 그 신라도 속초를 지나갔는데 그래서 속초에 발해박물관을 만든 게 아닌가 싶다. 그렇게 큰 규모의 박물관은 아니지만 아마 국내 유일의 발해박물관으로 알고 있다. 워낙에 텍스트 중심 박물관인지라 역사에 관심이 없다면 그렇게 흥미를 끌진 못할 수도 있다.
이제 설악산으로 이동한다. 멋진 산들은 역시 가는 길부터가 남다르다. 설악산을 가는 건 등산이 목적이 아니다. 장엄한 풍경은 그만큼의 체력 소모를 요구한다. 이미 어제부터 고된 여행일정을 지친 터라 그 험준하고 높은 설악산엔 감히 도전하지 못하고 케이블카를 타러 간다.
케이블카를 타러 갈 때 최대한 자가용은 피하길 바란다. 주말에는 그 길이 꽉 막혀 차가 도저히 움직이질 않으니 택시를 타고 길목에 내려 걸어가는 편이 훨씬 빠르다. 케이블카 대기선도 길기 때문에 번호대기표를 가장 먼저 끊어놓고 신흥사라든지 전쟁기념탑이라든지 찻집 혹은 기념품집을 구경한다. 케이블카를 타면 해발 700m인 '권금성'까지 올라갈 수 있다. 권금성은 고려시대 당시 몽골과 항쟁을 하던 과정에서 권씨 장군과 금씨 장군이 이곳 설악산에 성벽을 둘러쌓았다고 해서 유래한 이름이다.
케이블카를 타고 권금성에서 내렸으면 설악산 최고의 기암이라고 평가받는 '울산바위'를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옥황상제가 세계에서 가장 멋있는 봉우리들로만 금강산을 만들려고 했는데, 울산에서 출발한 울산바위만 제시간에 금강산까지 오지 못하고 설악산에 눌러앉아버렸다는 재치 넘치는 설화가 있다. 사실 울산바위는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보단 영랑호 주변에서 위로 올려다 보는 게 가장 멋진 거 같다.
권금성에서 속초 시가지와 바닷가, 그리고 그곳을 품고 있는 산세까지 두루 조망해보길 추천한다. 이토록 강직하면서도 듬직한 산세와 우아한 바닷가가 공존하는 곳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어제오늘 내가 돌아다니며 실향민들이 정착했던 곳이 반대로 생각해보면 얼마나 외지고 구석진 곳이었나를 생각해본다.
그리고 설악케이블카를 탈 땐 몸은 편하지만 반드시 알아야할 것이 하나 있다. 이 설악케이블카는 수많은 환경보호운동단체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수많은 동물들의 생태계를 담보로 지어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위이자 박근혜 전 대통령의 형부 되는 사람이 설악관광케이블카의 회장이라는 점도 이 설악케이블카가 순진한 의도로만 지어진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제 여행을 마무리할 차례다. 터미널 가는 길에 속초중앙시장에 잠깐 들러 빼놓으면 섭섭할 오징어순대와 홍게튀김으로 여행의 마무리를 장식한다. 사실은 내 허기의 마무리를 장식하는 거다. 그래도 차를 타기 전엔 든든해야 푹 잘 수 있으니까.
속초에는 세월의 눅진함이 있다. 산과 바다를 한 꺼번에 즐길 수 있다는 건그만큼 이곳이 외지고 갇힌 곳이라는 뜻이다. 고향을 잃고 방랑하던 피난민들이 살아보기 위한 사투를 벌인 곳. 그 생존의 흔적들이 속초 곳곳에 배어있다. 분단된 국가에서 남한 사람도 북한 사람도 아니었던 실향민들, 현지인과 외지인의 불편한 관계, 바다도 호수도 아닌 석호의 애매한 정체성, 산과 바다의 이질적인 공존. 딱 잘라 규정지을 수 없는 이 불안한 경계선 위에 놓인 속초는 애잔하면서도 그 자체로 비장미를 품은 도시다. 그런 과거가 현재의 속초를 더 입체적인 도시로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도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러나 근 십 몇 년 간 개발과 산업이라는 미명 하에 청초호와 영랑호의 자연생태계가 사라지고, 동물들의 서식지를 파괴시키는 케이블카 설치로 변화의 더딤이 무색해지고 있다. 그렇다고 다른 이익집단의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변화 자체를 일방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야속하다.
시간은 무조건 흐르는 법이고 모든 인간은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속초가 맞닥뜨린 이 딜레마 또한 슬기로운 생존방식으로 타협점을 찾아 나가길 바래본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책 추천
- 이호철 <50년대 초, 북한 피난민들 이야기>
2016년 별세하신 소설가 이호철 작가님은 함경남도 원산 출신으로 실향민이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작가님의 모든 소설에는 분단, 전쟁의 상흔, 실향이 가장 중요한 테마죠. 작가의 생애가 작품에 중요한 소설이 있고, 꼭 그렇지 않은 소설도 있는데 이호철 작가님의 경우는 전자입니다. 소설보다는 수필에 가까운 작품들을 많이 남기셔서 모든 소설들이 읽기 어렵지 않고 생생한 현장감이 전달되는 게 특징이죠. <50년대 초, 북한 피난민들 이야기<는 당신의 단편소설 중 하나로 전쟁의 명분이 되었던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무의미하고 부질없고 무망했는지,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비극적 운명에 던져졌는지를 꼬집는 풍자소설입니다. 해당 작품은 2011년 출판된 소설집 <<가는 세월과 흐르는 사람들>>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영화 추천
- 이강길 감독 <설악, 산양의 땅 사람들>
마찬가지로 얼마 전 별세하신 이강길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이강길 감독님은 문명의 갈퀴에 상처받는 자연을 찍어온 리얼리즘 다큐멘터리스트였습니다. <설악, 산양의 땅 사람들>은 설악케이블카 유치 발표에서부터 건설까지 케이블카를 반대하는 환경보호단체들의 숭고한 투쟁과, 케이블카를 통해 생계를 기대하는 사람들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기록한 다큐멘터리라니다. 설악케이블카 설치가 결코 단순한 문제만은 아니라는, 현실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엿보이는 작품이죠. 많은 다큐멘터리스트들이 이강길 감독의 별세를 안타까워 했다. 이강길 감독님은 설악산을 찍었고, 설악산은 영원히 이강길 감독님을 추모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