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촌놈의 국내여행 뿌수기 [익산 편]

이야기의 경계를 여행하다

by 이영



















한 개의 도시를 지정해서 여행할 때, 그 도시가 어느 유명한 이야기의 실제 배경이 되는 곳이라면 여행이 그렇게 또 이색적인 경험이 될 수가 없다. 여행의 컨셉이 확실해지고, 이야기의 흐름에 몸을 맡겨도 되며, 마치 내가 이야기 속에 들어가게 되는, 말하자면 '앨리스'가 되어 이야기를 여행할 수 있게 된다.


전북 익산은 어쩌면 한국인들에게 가장 유명한 사랑이야기인 '서동이와 선화공주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를 간단하게 풀어보자면 이렇다. 때는 삼국시대 후기, 공간은 백제. 어느 한 가난한 여인이 하루는 냇가에 나갔다가 용을 만나서 용과 정을 통했다. 그렇게 임신을 해서 나은 아이의 이름을 ‘장’이라고 했다. '장'은 비록 용의 아들이지만, 용은 사고만 치고 물러났기 때문에 홀어머니와 매우 가난하게 살아야만 했다. '장'은 산속에서 마를 캐며 그 돈으로 겨우겨우 생계를 유지했는데, 사람들은 장을 일컬어 ‘마를 캐는 아이’라는 뜻에서 '마 서(薯)'자에 '아이 동(童)'을 사용해 ‘서동’이라고 불렀다. 이때가 시기적으로 신라에서는 신라의 26대왕 진평왕이 재위하고 있을 때였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의 외모가 출중하여 외국에까지 그 명성이 자자했다. 한반도를 울릴 정도의 미모가 궁금했던 서동은 신라 경주로 넘어가서 그곳 가난한 아이들에게 공짜로 마를 주면서 노래를 부르게 하니 바로 '서동요'이다.


선화공주는 남몰래

남자를 사귀어 두고

밤마다 서동의 방을 찾아가

그를 안고 돌아간다


그러니까 아직 시집도 안 간 선화공주가 몰래 남자친구를 만들고 밤마다 그와 만나서 같이 자고 간다는 내용이다. 아주 남사시러운 노래가 유행하는 법. 아이들이 계속 부르고 다니니까 경주를 뒤덮은 유행가가 되었고 이게 진평왕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아무리 저자거리에 떠도는 노래라지만 그래도 공주가 어떻게 행실을 했길래 이런 노래가 유행하냐며 진평왕은 선화공주를 궁궐에서 내쫓는다. 오갈데 없던 선화공주 앞에 서동이가 나타나 자신이 이 노래를 퍼뜨린 장본인이라 밝혔고, 선화공주는 기왕 이렇게 된 거 책임지자면서 둘은 소박하게 결혼을 한다. 선화공주가 궁궐에서 나올 때 조금 가져온 황금이 있었는데 서동이가 이게 뭐냐고 묻더란다. 선화공주는 아주 귀한 보물이라고 하자 서동이가 깜짝 놀라며, 자기 고향으로 가면 소싯적 마 캐던 시절에 황금을 아주 많이 팠는데 뭔지 몰라서 그냥 모아만 놨다는 게 아닌가. 백제로 돌아간 두 부부는 실제 그 황금을 활용해 백제에서 아주 유명한 사람이 되었고, 선화공주의 내조 덕으로 서동이가 백제의 왕까지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 왕이 바로 백제의 30대왕 무왕이고, 물론 선화공주는 왕비가 된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의자왕이다.


서동이가 태어난 고향이자 서동이가 마를 캐면서 황금까지 같이 캐낸 뒤 뭔지 몰라서 그냥 뒀다는 그 장소가 바로 전북 익산이다. 과거 익산의 지명이 '금마저'였는데 여기서 '금'이 서동요 설화에 나오는 '황금'을 상징하는 게 아닌가 하고 추정하고 있다. 더불어 서동이와 선화공주가 황금으로 유명해졌다는 이야기는 부여장이 익산, 즉 금마저를 기반으로 세력을 형성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 이야기 속에 담긴 의미심장한 역사정치적 사건과, 그리고 여행을 통해 이 이야기가 어떻게 구현되는지 익산 여행을 통해 '이야기의 여행'을 떠나본다.




장독대의 시극

첫째 날은 서동요 이야기를 잠시 제쳐두고 고즈넉한 산책을 떠나본다. 먼저 찾아간 곳은 '고스락'이다. 고스락은 무형문화재 명인이 만드는 전통장을 파는 곳이다. 그 규모만 무려 3만 평에 이른다. 식재료를 발효시켜 장으로 담가 먹는 식문화는 동양에만 있는 전통이다. 그중 장도 국가마다 민족마다 이름은 같을지언정 먹는 방식과 발효시켜 먹는 방식은 각양각색이다. 고스락에서 만드는 각종 장들은 오로지 우리나라에서만 나는 식재료와 우리나라 전통 제조 방식만 고집한다.


고스락4.jpg


고스락에서 고집하는 또 한 가지의 '우리나라 고유의 것'이 있다. 바로 항아리다. 옛말에 "장독보다 장맛이 더 좋다" 는 말이 있어 장을 담는 장독, 혹은 항아리의 가치가 절하된 듯하지만 장을 만들 때 항아리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고 한다. 그 모양새와 크기도 장맛에 영향을 준단다. 고스락 정원에는 무려 4천 개의 항아리들, 즉 장독들이 있다. 장식품이 아니라 실제 장을 담구고 있는 항아리다. 높은 곳에 올라가도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이 장독대들이 펼쳐보이는 장관은 전통과 문화가 만들어낸 인류학적 경치다. 멋진 경관은 꼭 인간의 손이 타지 않은 자연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때로는 인간의 입김과 숨결이 빚은 훌륭한 풍경도 있는 법이다. 무엇보다 이 우아하면서도 호방한 연출은 한국의 항아리들이 만들어낸, 오로지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전통의 아름다움이 아닌가. 아닌게 아니라 이 장독치레는 예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중요시 여기던 미학이라고 한다.


"장독들은 해묵은 놈일 수록 은근하고 점잖아 보이고, 행주질을 많이 받는 놈일 수록 길이 들어서 야릇한 윤기를 더하며 소리 없는 즐거움을 주인에게 히죽이 표시한다. 장독들은 때로는 시무룩하고 때로는 허전해하며 또 슬퍼할 줄도 안다. 말하자면 장독을 주인의 심정을 반영하는 거울의 구실도 하는 것이다. 슬플 때 바라보는 장독들은 일그러진 주인의 얼굴을 가슴 위에 비춘 채 초근히 젖어 보이고, 기쁠 때 바라보는 장독들은 마음이 부풀어서 아낙네들의 즐거움을 바라보면서 미소 짓는 것이다. 서리 찬 한밤 내 달빛에 비추이는 장독대의 서정, 그리고 그 검정 그림자들의 화음은 소리 없는 한 막의 시극이라고 할까." -최순우 <후원과 장독대>


고스락13.jpg
고스락12.jpg


고스락에서는 카페도 운영 중이다. 카페에서 커피와 유기농 아이스크림도 먹고 집에 가서 어머니께 선물드릴 몇 가지 장도 사본다. 여행 예산이 있어 이것저것 다 살 순 없고... 가장 기본적이면서 가장 우리 정겨운 된장, 고추장, 간장을 사본다. 이곳 카페에서는 냉장발효시키는 장독대도 따로 구경할 수 있고, 장 만들기 체험도 가능하다.



함라마을 옛 담장

다음 산책코스는 함라마을이다. 요즘 레트로 혹은 뉴트로라고 복고풍 마을이 여행지의 새로운 테마로 각광받고 있는데, 이곳 함라마을은 그야말로 시간이 봉인된 마을이다. 카드계산이 안 되는 구멍가게부터 도시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마을버스 디자인, 그리고 전체적으로 소복히 내려앉아 푸근한 스카이라인까지. 인적마저 한산해 혼자 생각을 정리하거나 아무 생각하기 싫을 때 걷기 위한 최적의 공간이다.


함안마을10.jpg


함라마을은 지금도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그리 크지 않은 한옥마을이다. 그런 점이 오히려 자연스럽고 정겹다. 함라마을은 돌담길이 유명하다. 흙으로 담을 쌓아올리고 그 안에 아무렇게나 올라가 있는 돌들의 앙상블은 한국만의 질감을 아주 입체적으로 표현해낸다. 더군다나 담의 높이가 높아 담장이 집을 가리는 역할을 하기보단 신비스러운 길을 만들어주는 느낌이다. 마치 이 길을 걸어 따라가면 오즈의 세계로 연결될 것만 같은. 고풍스러운 이 멋드러진 담장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으며 스스로에게 취해본다.


함안마을15.jpg
함안마을16.jpg


첫째날의 저녁은 마 요리 전문점인 '본향'으로 가본다. 마 요리 전문점이라니. 대한민국에 마 요리 전문점은 또 쉽게 찾아볼 수 없으니 서동요의 고장 익산에서 먹어보는 것도 여행의 백미가 아닐까. 마를 활용한 다양한 요리와 정식까지 있으니 기호에 따라 주문해서 신나게 먹으면 된다. 마약주까지 시키는 걸 잊어선 안 된다. 착각하지 말자. '마약 주'가 아니라 '마 약주'이다.


미륵사, 서동이와 선화공주의 '사랑의 결실'

둘째날은 익산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미륵사지에서 시작한다. 미륵사지 가는 길에 택시기사님한테 추천받은 '맛동순두부' 집에서 점심을 해결한다. 과연 택시기사님의 픽엔 실패란 없다.


미륵사지가 서동요의 이야기를 푸는 열쇠와도 같은 유적지이기 때문이다. 서동요 이야기의 마지막은 미륵사에서 끝이 난다. 왕과 왕비가 된 무왕과 선화공주는 자신들의 근거지였던 익산에 ‘미륵사’라는 절을 창건했다면서 삼국유사의 서동요 설화가 마무리되는데, 설화 속에만 나오는 장소가 떡하니 실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서동요 설화의 두 주인공 중 무왕은 설화와 실제 역사에 존재하는 실존인물이지만, 선화공주의 경우 그렇지 않다. 선화공주는 설화에서만 등장할 뿐 실제 역사서에서는 백제 측 역사서와 신라 측 역사서를 통틀어도 등장하지 않는다. 신라의 왕 진평왕에게 세 번째 딸이 있었다는 기사조차 거론되지 않는다. 그래서 비록 실제 역사서에는 ‘선화공주’라는 이름이 안 나오지만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의 결실인 미륵사는 실재하니까 후대의 사람들은 이 풋풋한 사랑이야기를 믿기로 한 것이다.


익산의 미륵사는 건물이 전부 훼손되었고 그 터만 남아 있어 미륵사'지'로 존재할 뿐이지만 그 터의 규모를 고려해본다면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절이었다. 미륵사는 단순히 건축사적으로만 의미있는 곳이 아니다. 허허벌판의 터에 고고하고 늠름하게 자리잡은 미륵사지 석탑은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이다. 미륵사지에서는 한국미술사와 문화사에 있어서 최대와 최초를 동시에 경험할 수 있다.


서동요 도입부에서 서동의 엄마가 용과 관계를 맺어 서동이를 잉태했다. 보통 신화에서 용은 왕 혹은 왕족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용이 어느 외진 곳의 미천한 여인과 정을 통했다는 건, 백제의 왕이 공식적인 왕비로부터가 아니라 고귀하지 않은 여인과 사통했다는 뜻이다. 즉 서동이는 백제왕의 사생아였다. 서동이의 친부인 이 백제의 왕이 누구인지는 해석이 분분하다. 서동요 설화에서 서동이가 고생고생하다가 왕이 됐다는 스토리는 무왕이 사생아였기 때문에 즉위과정이 순탄치 않았다는 사실을 함의한다. 실제 역사에서 무왕이 즉위하기 전까지 그 전의 왕, 그리고 그 전전 왕의 재위기간이 합쳐서 2년이 채 안 된다. 이건 왕권이 심각하게 추락해있었다는 뜻이며, 귀족의 힘이 왕보다 더 강했다는 뜻이고, 원래 왕위 서열에 없던 부여장이 무왕으로 힘들게 즉위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삼국유사에선 마 캐던 가난한 아이가 왕이 됐다는 설화로 재탄생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귀족집안은 당시 백제의 수도 사비성(지금의 충남 부여)을 기반으로 한 사택씨 가문을 지칭한다. 무왕은 즉위 후 무왕은 사택씨 가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수도를 충남 부여에서 전북 익산으로 천도하려고 했다. 무왕은 작정하고 익산에 대규모의 궁궐과 사찰을 비롯해 도시를 만드니, 이렇게 해서 탄생한 백제 최대 규모의 사찰이 바로 지금의 미륵사다.


한반도가 처음 불교를 수용한 이래 고구려든 백제든 신라든 사찰을 건립할 때는 나무로 만든 목탑만을 고집했다. 미륵사에도 원래는 거대한 목탑이 있었다. 단 백제의 무왕은 유례없는 사찰을 건립하고 싶어 했고 그래서 목탑을 가운데에 두고 양옆으로 단 한 번도 이 땅에서 시도된 적 없던 석탑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이를 두고 유홍준 교수는 건축에 '윙'을 단 명쾌한 배치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래서 미륵사지 석탑은 돌로 만들어지긴 했지만 외형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석탑의 양식이 아닌, 영락없이 목탑의 외양이다. 아무래도 한국 최초의 석탑이다보니 따로 정해진 양식이 없었고 외관만은 목탑을 그대로 답습한 과도기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미륵사5.jpg 미륵사지 석탑


미륵사지에는 중앙의 목탑 하나와 양 옆의 석탑이 두 개가 있었는데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미륵사지와 목탑은 전소되었고 동석탑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 내막은 알 길이 없다. 유일하게 덩그라니 남아있던 서석탑도 훼손 상태가 매우 심했는데 하필이면 서석탑에 메스를 들이댄 주체가 일본총독부였다. 일제강점기 초창기였던 1915년 미륵사지 서석탑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다는 보고가 총독부에 접수되자 총독부는 서석탑 보존사업에 나섰다. 총독부는 훼손상태가 심한 경사부분을 막대한 양의 시멘트로 뒤덮어버리는 충격적인 조치를 내렸다. 문화재와 예술작품을 대할 때 가장 중요한 미학적 고민과 예술적 태도를 버리고 오로지 가성비와 효율성만을 기준으로 내린 매우 근대적인 발상이었다. 결국 그나마 남아있던 미륵사지의 서석탑마저 시멘트가 덕지덕지 발라진 치욕을 해방 이후까지 감내해야만 했다.


국립익산박물관10.jpg 미륵사 복원모형도


90년대에 들어서 대한민국 정부는 미륵사지를 조금이나마 회복시키겠다며 서석탑의 모습을 본따 동석탑을 1993년 복원해냈다. 현재 서석탑은 6층이 전부이지만 체감률을 고려해봤을 때 본모습은 9층이었을 것으로 분석하고 남은 부분은 상상에 의존해 동석탑을 복원해냈고 그 기간은 고작 2년이었다. 지금도 복원된 동석탑과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서석탑을 동시에 보면 이토록 부자연스러울 수가 없다. 일단 동석탑이 서석탑과 모습이 같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으며, 복원공정도 현대식 기계로 단번에 돌을 잘라버려 영혼이 없는 AI를 보는 느낌이다. 아무리 인간과 외형이 비슷한 AI를 만들어도 감정이 없는 이상 인간이라고 볼 순 없지 않은가. 동석탑은 언제 봐도 졸작이다.


서석탑의 경우도 시멘트의 역사를 발라버리는 프로젝트가 이어졌다. 시멘트를 벗겨내고 그 부분만 복원했는데 98년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2018년에 되어서야 끝이 났다. 무려 20년이나 걸렸다. 서석탑은 최대한 백제인들이 직접 사용했던 돌들을 사용했고, 굳이 기계를 사용할 수 있었음에도 석공들에게 일일이 정으로 쪼개했단다. 동탑의 경우 하나 전체를 만들어내는데 2년이 걸린 반면, 서탑은 일부만 복원하는데 20년이 걸렸다고 생각해보면 예술의 높은 경지는 예술작품에 투입되는 인간의 노력과 정성에 비례한다는 부정할 수 없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게 다시 태어난 서석탑은 정말 압도적이면서도 경이로운 감탄을 자아내게 할 정도로 늠름하다. 미륵사지 서석탑은 국보 11호로 지정되어 있다.


미륵사6.jpg
미륵사13.jpg



사리장엄구를 모시게 된 국립익산박물관

서석탑을 한창 복원 중이던 가운데 2009년경 서석탑에서 보물이 하나 발견된다. 바로 사리장엄구이다. 사리장엄구란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시는 함으로, 3단 구성으로 하여 탑 안에 두는 게 일반적이다. 서석탑에서도 3단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먼저 가장 안쪽에는 사리를 담은 유리병이 있고, 2단 사리호는 금으로 만든 금제사리호이며, 가장 바깥쪽 사리호는 청동으로 만든 뒤 금으로 도금한 금동 사리호 이렇게 3중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청동 사리호는 공예사적으로 가장 화려하다고 평가받는 걸작이다. 형태미도 형태미지만 겉면에 장식된 디자인은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로 연이은 감탄을 유발한다. 한눈에 봐도 인상적이며 더 세부적으로 관찰하면 백제인들의 디자인 솜씨에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게 된다. 점과 선 활용의 극치를 보여주는 다양하면서도 아름다운 기하학적 장식은 현대추상화를 떠올리게 한다. 아주 작은 빈틈조차 허용하지 않은 완벽한 숭고미다. 미륵사지 사리장엄구는 미륵사지 바로 옆에 붙어있는 국립익산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4d35ba2c26db606d8eb8b901f3bf6348.jpg 미륵사 사리장엄구 금제사리함(좌)과 금동사리함 (사진출처: 전북일보)


국립익산박물관은 1997년 미륵사지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보관하고 전시하기 위해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하였다가 2019년 '국립익산박물관'으로 승격되었고 2020년 새로운 모습으로 리모델링하여 재개관하였다. 미륵사지와 서동설화, 그리고 무왕에 대해 더 깊은 이해와 학술적인 이해가 필요하다면 꼭 방문할 것을 추천한다.


미륵사 사리장엄구 발굴 모습 재연

2009년 사리장엄구가 발견되면서 서동이와 선화공주의 풋풋한 사랑이야기를 진실로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사리장엄구와 함께 사리봉영기가 출토된 것이다. 사리봉영기는 석탑에 사리를 봉영하고 사찰을 건립한 내역을 적은 기록문이다. 이 사리봉영기에 미륵사지 석탑은 "백제왕후였던 사택적덕의 따님이 봉영했다"고 적혀 있다. 즉 무왕의 아내는 선화공주가 아니라 당대 백제에서 제일 가는 권세가문 사택 씨에서 배출된 사택왕후였다는 것이다. 서동요 스토리를 진실이라고 믿고 있던 사람들은 미륵사만 보면서 이 이야기를 실화라고 생각했는데, 그 미륵사에서 무왕의 왕비가 ‘사택왕후’라고 쐐기를 박았다.


그렇다면 정말 선화공주는 실제론 존재하지 않았던 허구인물이었을까? 선화공주의 정체를 밝히러 미륵사지를 나와 정확한 주인을 알 수 없는 익산의 거대한 두 무덤, 쌍릉으로 향해본다.


쌍릉, 선화공주의 단서

쌍릉 중 소왕묘

쌍릉은 익산에 있는 거대한 봉분으로 조금 더 크기가 큰 대왕묘와 상대적으로 크기가 더 작은 소왕묘 이렇게 두 개가 있어서 '쌍릉'이라고 사람들은 불러왔다. 시기적으로 백제 시대의 무덤인 것만은 확실하다. 비록 무덤의 주인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이 정도 크기의 무덤이라면 왕족이나 그에 준하는 지배층의 무덤일 것이고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이 두 무덤이 무왕과 선화공주의 무덤이라고 믿어왔다. 그 옛날 조선시대 때에도 사람들은 이 두 무덤의 주인이 무왕과 선화공주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서동요 이야기의 결말이 익산에서 끝이 나기 때문에 증거는 없지만 그럴 듯 해 보인다.


단 미륵사에서 나오지 않았나! 백제 무왕의 아내는 사택왕후라고! 이 미스테리를 풀어주는 존재가 무왕의 장남 의자왕이다. 의자의 출생연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주 늦은 나이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태자 책봉'은 조선시대 때나 집착했지 그 이전에는, 특히 삼국시대에는 태자 책봉이 그다지 중요한 관례는 아니었다. 백제사를 통틀어도 태자 책봉 후 왕위에 오른 케이스가 그렇게 많지도 않다. 만약 의자의 친모 집안이 당대 백제에서 가장 입김이 셌던 사택씨 가문이라면 의자는 굳이 태자에 책봉되지 않더라도 탄탄대로로 왕위에 오를 수 있어야 한다. 더군다나 나중에 의자가 왕이 되고 얼마 안 있어서 사택왕후와 그녀의 아버지 사택적덕이 같은 해에 사망한다. 사인은 나오지 않지만 부녀가 같은 해에 동시에 죽었다니 미심쩍지 않은가? 심지어 일본 측 기록엔 이 두 사람이 죽은 해에 사택적덕의 다른 딸들과 의자왕의 동생 부여교기를 비롯한 백제 대신 수 십 명이 일본으로 망명 온 기사가 있다. 구체적인 정황은 전해지는 바가 없지만 여러 가지 상황을 따져봤을 때 의자왕이 피의 숙청을 감행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자기 친엄마와 외할아버지를? 하지만 사택왕후가 의자왕의 생모가 아닌 계모라고 하면 모든 게 맞아떨어진다. 동생 부여교기 또한 의자왕의 친동생이 아니라 이복동생인 것이다.


무왕은 당시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지금의 충남 부여군)에 기반을 둔 사택씨 가문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전북 익산으로 수도를 옮길 계획이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론 수도를 옮기지 못했다. 궁궐도 만들고 거대한 사찰까지 다 만들어놓고 왜 정작 천도를 단행하지 못했을까? 아마 무왕 입장에선 본인과 사택왕후 사이에 낳은 둘째아들 부여교기가 아닌 장남 의자를 차기 국왕으로 세우는 조건으로 익산 천도를 포기했을 것이다. 일종의 정치적 거래였던 셈이다. 정치적 거래가 성사됐음을 입증하기 위해 공사 중이던 미륵사를 사택씨 가문의 재력으로 완공한 게 아닐까하는 개인적인 추측을 해본다. 그렇다면 의자왕의 생모는 누구인가? 의자왕의 생모는 누군지 알 단서가 전혀 없다. 다만 주류귀족도 아니거니와 의자를 정치적으로 강력하게 지지해줄 수 있는 가문도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후대의 사람들은 의자왕의 생모가 선화공주가 아니었을까 추측할 뿐이다. 확실한 건 의자왕의 부인은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중 한 명은 사택왕후이지만 첫째부인이자 의자왕의 생모는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선화공주로 생각해볼 여지는 충분히 있다.



쌍릉 중 대왕묘 (발굴 중이다)

다시 쌍릉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 주인조차 명확하게 알 수 없어서 사람들은 대왕묘를 무왕의 것으로, 소왕묘를 선화공주의 것으로 여겼다. 그러던 중 얼마 전인 2018년 (따끈따끈한 소식이다) 쌍릉 대왕묘에서 인골이 발견됐다.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인골을 분석한 결과 인골의 주인은 60~70대의 성인 남성의 그것이고 7세기 정도의 인골로 밝혀졌다. 무왕의 무덤으로, 서동이의 인골로 결론지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옆의 소왕묘는 무왕의 아내, 즉 당시 왕비의 무덤일 수밖에 없다. 아쉽게도 소왕묘에선 인골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이곳에서 출토된 관꾸미개를 분석해본 결과 사택왕후 죽음의 연도 642년보다 앞선 것이라고 한다. 무왕에게 사택왕후가 아닌 다른 미지의 왕후가 있었음을 고고학적으로도 증명되었다. 이 왕후가 누군지인지 모르겠으나 아마 의자왕의 생모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루지 못한 왕도의 꿈을 품은 왕궁리 유적

무왕은 결국 익산으로 천도하지 못했다. 무왕의 익산 천도 계획은 거의 완료가 된 시점이었다. 이미 궁궐까지 다 만들어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 궁궐은 만들어지기만 하고 사용되지 못한 채 남겨져 있다가 사찰이 되어버렸다. 언제 사찰이 되었는지는 설만 분분하다. 의자왕이 이어받아 사찰로 확장시켰다는 설과 통일 이후 신라 정부가 백제유민들을 달래기 위해 조성했다는 설이 있다. 무왕이 애써 만든 궁궐이 바로 사라지지 않고 어느 정도 더 이어져 갔다는 것으로도 의미가 충분하다. 물론 지금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고 터로 존재하지만 거대한 석탑 하나만은 남아 있다. 그 터만이라도 발굴한 결과 이 때의 왕궁이 생각보다 규모가 컸던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 이 유적지는 '왕궁리 유적'이라고 명명되었는데 동네 이름이 '왕궁리'였다고 한다. 행정부나 국가가 지은 이름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부터 동네사람들에게 몇 세대에 걸쳐 내려오던 지명이었다고 하니 분명 이곳이 무왕의 못다 이룬 왕도가 배긴 곳일지다.


전북 익산은 공식적인 백제의 수도가 아니었음에도 충남 공주, 부여와 함께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도시이다. 세계문화유산인 만큼 신라의 경주를 생각하고 왕궁리 유적을 방문한다면 실망감을 감추기 힘들 것이다. 이곳 왕궁리 유적은 1989년부터 30년 넘게, 그리고 아직까지도 발굴 중인 곳이며 아무 것도 없이 터만 남아 대체 무엇을 봐야할 지 당혹스럽기도 할 것이다. 이 터를 산책하며 이제부터는 여행자의 상상력 역량에 따라 달려 있다. 시간이 남긴 넓은 빈 터를 채우는 건 우리들 상상력의 몫이다. 사찰의 흔적이든, 정원의 흔적이든, 공방의 흔적이든, 화장실의 흔적이든 왕궁리 유적 곳곳에 흔적들만 있을 뿐 당장의 육안으로 보이는 건 매한가지다. 상상의 눈으로 이 공간을 채워보자. 왕궁리 5층 석탑만이 우뚝하게 솟아 공간 전체의 신비스러움을 더하고 있다.


왕궁리 유적10.jpg


왕궁리 유적에서 출토된 은제도금 금강경판과 사리장엄구는 모두 국립익산박물관에서 감상할 수 있다. 은제도금 금강경판에 새겨진 금석문은 높은 품격을 지닌 백제 최고의 필치로 인정받고 있으며, 왕궁리 사리병과 사리상자는 백제의 우아함을 여실히 뽐내주는 또 하나의 걸작공예품이다. 박물관에서 해당 유물들을 볼 때 역사를 본다는 생각보다는 예술작품을 감상한다는 마음가짐으로 감상하면 감동이 또 다를 것이다.


국립익산박물관6.jpg
국립익산박물관8.jpg
왕궁리 출토 사리장엄구(좌), 은제도금 금강경판(우)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백제지구 중 한 곳으로 지정된 익산은 공식적인 백제의 수도였던 적은 없다. 다만 백제 말기 서동요 설화의 주인공 무왕이 본인 나름에서 백제의 성장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백제의 역량을 투입시킨 야심작이였던 것만은 맞다. 삼국 통일 후 신라 정부가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을 달래주기 위하여 고구려 왕족 안승을 국왕으로 임명한 괴뢰 정부를 전북 익산(금마저)에 두어 익산이 일시적이나마 한 국가의 수도가 된 적도 있다. 혹자는 수도가 되지 못한 실패의 도시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서동이와 선화공주의 이야기를 품은 낭만적인 도시 앞에 수도로의 지정 여부는 무의미하며, 그 이면의 역사적 사건까지 고려해보면 정말 대작의 도시다.


"익산은 역사적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은 왕도의 꿈이 서린 곳이며, 한국미술사의 가장 우뚝한 봉우리인 석탑의 시원양식이 지금도 그 폐허 속에서 금자탑보다도 더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는 곳이다." -유홍준


익산 여행을 마무리하며 서울 가는 기차에서 감감히 생각해본다. 그래서 무왕의 그녀이자 의자왕의 친모는 누구였나? 선화공주는 실존인물인가 허구인물인가? 모른다. 베일에 가려진 그녀의 진짜 정체는 아마 알 길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차피 이 여인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을 거라면, 비록 가공의 인물이지만 그녀를 그냥 ‘선화공주’라고 믿도록 내버려두는 건 어떨까. 역사라는 게 100% 진실로만 채워질 수 없기 때문에 일반 대중 입장에서 옛날이야기들을 하나의 문화콘텐츠로서 풍성하게 즐기는 것도 역사를 잊지 않는 방법 중 하나이기도 하다.


또 한 가지 익산 여행은 역사기행이 아니었다. '이야기'에 대한 여행이었다. 지어진 이야기에 진위여부를 따지는 건 어쩌면 무의미할 수도 있다. 사람을 몰입시키고 상상의 세계로 이끄는 이야기의 힘에, 여행의 진력에 빠져보는 것이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책 추천

- 이병기 <가람시조집>

익산에는 가람 이병기의 생가가 있습니다. 가람 이병기는 근대 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사까지를 온몸으로 겪은 국어학자 겸 시인이시죠.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어가 파괴되는 과정에서도 꿋꿋하게 한국어를 지키기 위해 문법을 정리하는 등 국어학 연구에 힘을 쓰시는가하면 시 창작을 통해 왕성한 문학활동도 이어나갔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현대시가 아닌 시조를 쓰는 시조시인이었습니다. 오히려 지금보다 훨씬 서구문화에 대한 열정이 과도하고 전통에 대한 비아냥이 팽배했던 그 시절에 한국어의 맛을 가장 잘 살리는 문학은 전통음악이자 전통시조라며 시조만을 고집했죠. 덕분에 시조의 맥이 끊이질 않고 지금까지도 많은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는 대선배입니다. 말하자면 가람 이병기는 전근대의 마지막 시조시인이자 현대시조의 문을 연 1세대 시인이랄까나요. 그런 가람 이병기의 작품을 모은 <가람시조집>이 2012년 재발행되었습니다. 로맨티시즘에 입각한 유려한 문체와 아름다운 표현력에 취하느라 빠르게 읽기가 힘들 정도의 낭만적인 시조를 만끽해볼 수 있답니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영화 추천

- 로저 미첼 감독의 <노팅 힐>

이미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 봤을 법한, 로맨틱 코미디계의 대표적인 영화죠. 사랑하는 두 남녀 사이에 신분 차 혹은 계급 차가 구도를 전제로 남자가 상대적으로 아랫계급에 속하고 여자가 윗계급에 속한다는 설정에서 영화의 내용이 서동요의 이야기와 비슷한데서 출발합니다. 로저 미첼 감독의 인지도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휴 그랜트, 줄리아 로버츠의 캐스팅과 <어바웃 타임>, <맘마미아!2>, <러브 액츄얼리> 등을 집필한 리차드 커티스의 각본이 합쳐졌으니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 알맞은 모든 요소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조화를 이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용 자체는 단순하고 이미 본 영화라 할지라도 서동요의 사랑이야기에 풍덩 빠진 후 이 영화를 다시 보면 그 달콤함이 또 다르게 느껴지리라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