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하여
5화.
불과 물의 날개 – 나무별의 첫 혁명
루메아의 계절은 오래도록 변함이 없었다.
북쪽의 실바(Silva),
‘숲’이라는 뜻의 고대어를 품은 이름은 눈과 얼음을 품고,
동쪽의 비르디(Virdi),
‘푸름’을 뜻하는 바람어를 가진 땅은 꽃과 잎을 기르고,
서쪽의 솔리스(Solis),
‘태양’을 닮은 이름은 태양의 즙을 모으며,
남쪽의 아우룸(Aurum),
‘황금’을 뜻하는 고대 빛의 언어는 낙엽의 귀향을 지켰다.
네 계절의 호흡만으로도 세상은 충분히 완전해 보였다.
그러나 어느 날,
경계의 숲그늘에서 낯선 두 종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는 엠버(Ember),
불씨를 뜻하는 이름처럼 붉게 달아오른 줄기와 스스로 열을 내는 몸, 닿는 자리에 잎과 풀이 재로 변하는 발걸음을 가졌다.
다른 하나는 네르바(Nerva),
‘물줄기의 신경’을 뜻하는 물의 종족으로, 맑은 수액을 품고 건조한 가지를 푸르게 되살리는 손길, 마른 대지에 다시 숨을 불어넣는 흐름을 지녔다.
네르바와의 만남은 부드러웠다.
가뭄의 해에 그들이 가져온 물은 봄의 꽃을 살리고 여름의 열매를 키웠다.
비르디의 꽃장수 리오라는 네르바의 손을 꼭 잡고
“당신이 아니었다면 올해 첫 꽃은 눈을 뜨지 못했을 거예요”
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솔리스의 양봉꾼들은 강가에 작은 제단을 세워 물을 나누는 의식을 치렀고, 그날 밤 숲은 빛 대신 물소리로 환해졌다.
그러나 엠버와의 만남은 달랐다.
그들이 가까워지면 숲은 검게 그을리고, 아우룸의 황금 잎은 먼지처럼 흩어졌다.
실바의 얼음꽃은 불길 앞에서 눈물처럼 녹아내렸다.
아우룸의 장터에서 일하던 상인 로마는 불씨 하나가 장터 천막에 튀자, 허둥지둥 물을 들이붓고는
“저 불이 웃으며 다가온다 해도, 내 가게엔 들이지 않겠소”
라며 떨었다.
나무 종족들은 그들을 두려워했고, 경계 너머로 물러나기를 요구했다.
시간이 흘러,
불의 종족과의 거리는 멀어졌다.
그럼에도 가을의 어느 날, 아우룸의 한 장인이 바람결에 날아든 작은 잔불을 손에 쥐게 되었다.
그는 떨면서도 그것을 잎 위에 조심스레 얹어 바람을 막았다.
잔불은 꺼지지 않고 오래 타올랐다.
그때 그는 깨달았다. 불은 삼키면 죽음이지만, 품으면 생명일 수 있다는 것을...
불의 첫 쓰임은 삶을 덥히는 일이었다.
실바의 얼음꽃이 녹아 따뜻한 물이 되었고, 비르디의 꽃향이 공기 속에 퍼졌다.
곧 불은 도구를 만드는 일에 스며들었다.
그러나 모두는 그 불의 쓰임의 움직임이 필요했다.
가장 오래된 장로들이 모였다.
수백, 어떤 이는 천 년의 나이테를 가진 이들.
그들의 몸속에는 세월이 압축된 단단한 결이 있었다.
장로들이 말했다.
“우리의 몸을 깎아 원을 만들라. 뿌리의 기억이 계속 굴러가도록.”
젊은 장인들은 울었고,
장로들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날,
깎여 나온 결은 바퀴와 톱니가 되었고, 나무별의 첫 수액 바퀴가 돌기 시작했다.
불을 안전하게 다루려면 껍질이 필요했다.
가장 오래된 장로들의 가슴속에는 상처가 굳어 만든 호박이 있었다.
황금빛으로 굳은 그 덩어리는 빛과 수액을 오래 품어 맑고 단단했다.
장로들은 자신의 심장을 열어 호박을 꺼냈다.
호박은 곱게 갈려 투명한 렌즈와 두께 있는 판이 되었고, 그 판은 불꽃을 가두는 덮개가 되었다.
그날 이후 불은 숲을 태우지 않고, 빛과 열만을 내주었다.
달구어진 껍질은 도구의 형상을 만들었고, 졸인 수액은 강한 접착이 되어 결과 결을 단단히 묶었다.
바람의 힘과 결합한 빛의 관은 멀리까지 신호를 보내는 길이 되었다.
이렇게 루메아의 첫 번째 큰 혁명이 시작되었다.
불과 물이 만나 증기가 태어났다.
증기의 힘은 바퀴를 돌렸고, 바퀴는 깊은 곳의 수액과 물을 끌어올려 숲과 숲을 잇는 통로가 되었다.
네 계절의 종족은 불과 물을 중심으로 둥글게 모였다.
이를 그들은 ‘뿌리의 연맹’이라 불렀다.
엠버는 불을 다루는 법을,
네르바는 불을 식히는 물의 이치를 가르쳤다.
나무별의 밤은 더 이상 어둠에 갇혀 있지 않았다.
솔리스의 장인 칼로는 태양잎에서 떨어지는 빛 조각을 모아 호박 덮개 안에 넣었고, 밤에도 낮처럼 환한 작업장이 열렸다.
그곳에서 어린 비르디 견습공이 망치를 들고
“이제 우리도 하늘까지 닿는 사다리를 만들 수 있을까요?”
하고 물었을 때,
장인들은 대답 대신 긴 침묵을 나눴다.
세 번째 혁명은 소리의 길에서 왔다.
불, 물, 바람, 빛을 한데 엮어 거대한 진동을 만드는 장치가 발명된 것이다.
북쪽 실바의 느린 노래가 남쪽 아우룸의 숲에서 울렸고, 동쪽 비르디의 봄노래가 서쪽 솔리스의 태양숲에서 메아리쳤다.
종족들은 물리적 거리를 조금씩 잊었다.
마지막, 네 번째 혁명은 기억의 형태를 바꾸었다.
나무들의 의식과 나이테의 이야기를 작은 빛의 씨앗에 담아 먼 곳까지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한 나무의 깨달음이 곧 온 숲의 것이 되었다.
그 무렵 누군가 물었다.
“뿌리가 닿지 않는 곳에도 생명이 있을까?”
그 질문은 숲의 고요를 깨뜨렸다.
오랫동안 ‘루메아가 전부’라 믿었던 이들에게 처음으로 ‘밖’이라는 윤곽이 떠올랐다.
실바의 장로는 고개를 저었다.
“하늘 너머에도 숲은 이어져 있다, 경계를 만들 필요가 없다.”
비르디의 노인은 미소 지었다.
“설령 밖이 있다 해도 우리에겐 불필요한 길이야.”
그러나 젊은 솔리스와 아우룸의 장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바람의 끝에 서서 오래도록 하늘을 바라보았다.
불과 물이 증기를 만들고, 증기가 바람을 타면, 언젠가 우리는 하늘 끝 너머로 갈 수 있지 않을까.
루메아의 뿌리만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면, 그 밖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날 이후,
종족들의 발은 여전히 땅을 딛고 있었지만, 마음은 조금씩 하늘을 향해 뻗어갔다.
바람은 여전히 숲을 스쳤으나, 이제 그 바람 속에는 알 수 없는 향이 섞여 있었다.
질문의 냄새,
동경의 기운,
아직 이름 붙일 수 없는 미래의 온기.
그리고 누군가는 속삭였다.
“뿌리는 아래로만 자라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뿌리도 하늘을 향해 자라, 날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