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마음이 되었는가?
8화.
인식 _ 존재를 지각하는 빛의 첫 닿음
인식은 의식의 손끝에서 처음 세상을 어루만지는 일이다.
무의식이 세계를 품고,
잠재의식이 그것을 스며들게 하며,
의식이 조명을 비춘다면,
인식은 마침내 그 빛을 통해 대상을 바라보는 찰나의 순간이다.
우리는 흔히 ‘본다’고 말하지만,
진정으로 본다는 것은 받아들이는 일이다. 받아들인다는 건, 나 아닌 것을 나의 내부에 초대해 그 존재의 형상을 새기는 일이다. 인식은 바로 그 문턱에서, 타자를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최초의 작용이다.
감각은 외부 세계가 나에게 남긴 첫 흔적이고,
느낌은 그 흔적이 내면을 스쳐 지나간 여운이며,
감정은 그 여운이 쌓여 물든 색이다.
인식은 그 모든 흐름을 통과한 뒤, 마음이 의미를 부여하고 구조를 세우는 결정의 순간에 도달한다. 감각이 들어오고, 느낌이 흔들리며, 감정이 반응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인식이 일어난다. 인식은 마음의 여과지이며, 감각과 감정의 잔향이 머무는 결정의 장소다.
그러나 인식에는 섬세한 경계가 있다.
우리는 아직 분명히 보거나 듣지 않았는데도, 이미 어떤 것을 인식하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다.
무의식이 남긴 흔적이 의식의 표면에 미리 반사되는 그 순간, 인식은 경험하지 않은 것조차 경험처럼 받아들인다. 이때 인식은 무의식의 그림자를 빌려오고, 그 그림자는 때로 실제보다 더 강렬하게 우리를 흔든다.
인식은 단순한 감각이 아니다.
감각이 물리적 자극에 대한 반응이라면, 인식은 그 자극에 의미를 부여하는 정신의 해석이다. 눈으로 나무를 본다면 그것은 감각이지만, 그 나무에 이름을 붙이고 계절을 느끼며 기억과 연결시키는 순간, 그것은 인식이 된다.
인식은 의미의 시작이며, 감정의 예고이자 사고의 문이다. 모든 마음의 흐름은 이 좁고 깊은 입구를 지나간다. 그렇기에 인식은 마음의 첫 줄기이자 자아의 문지방이다.
어린 시절,
나는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며 “저것이 하늘”이라 말했다. 그러나 어느 날은 그 하늘이 외로워 보였고, 또 어떤 날은 포근하게 느껴졌다. 똑같은 하늘인데 왜 다르게 보였을까. 그때 처음으로 나는 인식의 깊이를 자각했다.
보는 것과 느끼는 것 사이에는 해석이라는 다리가 있다. 그 다리는 나의 상태와 기억, 그리고 시간의 결이 엮여 만들어진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지만, 내가 다르게 인식하는 순간 세상은 전혀 다른 얼굴이 된다. 인식은 그렇게 세상을 다시 쓴다.
초등학교 시절,
한 친구가 새 운동화를 자랑하던 날이 있었다. 이유 없이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 신발이 부러웠던 것도 아닌데, 마음속이 서늘했다.
훗날 돌아보니 그 시기는 우리 집 형편이 어려웠고, 부모님의 얼굴에는 자주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친구의 환한 웃음과 운동화는 내 안에 오래 가라앉아 있던 결핍을 건드렸던 것이다. 그때 나는 알았다. 인식은 단지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면이 그 대상을 어떻게 비추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감도로 다가온다는 것을.
인식은 때로 나를 규정하기도 한다.
누군가 “넌 원래 그런 애잖아”라고 말할 때, 나는 그 말에 나를 맞추고 그 틀 안에 스스로를 고정시킨다. 마치 그 말이 나보다 나를 더 잘 안다는 착각 속에서, 나는 자아를 타인의 인식 속에 잠그곤 한다.
그러나 인식의 문을 여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다. 인식은 외부에서 오지만, 그것을 초대하고 수용하는 주체는 언제나 ‘나’다. 인식은 초대와 수용의 합으로 완성된다.
문제는 그 기준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선택적으로 인식하며 산다. 뇌는 생존을 위해 ‘중요한 것’만 받아들이려 하지만,
그 중요함의 기준은 누구의 것인가?
사회로부터,
혹은 부모로부터 심어진 잣대일 수도 있다.
결국 나의 인식은 타인의 언어와 문화적 코드로 짜인 집합체일지 모른다. 인식은 가장 은밀한 조작의 장소다. 내가 믿고 있는 ‘나의 인식’조차, 누군가가 장착해 놓은 렌즈를 통해 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술은 이 인식의 구조를 정면으로 흔든다.
추상화 앞에서 우리는 종종 말문을 잃는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모르겠다’는 혼란 속에서 인식의 언어는 무너지고, 순수한 감각만이 남는다. 그 지점에서 인식의 재구성이 시작된다.
낯설었던 것이 친숙해지고, 익숙했던 것이 낯설어지는 순간. 인식은 일상의 감각 틀을 뒤흔들며 새로운 시선을 태동시킨다.
어느 늦은 밤,
흐릿한 가로등 아래 벤치에 앉아 나는 한 줄의 시를 썼다.
“나는 본 적 없는 풍경을 기억하고 있다.”
그 문장을 쓰는 순간, 걸어본 적 없는 골목과 맡아본 적 없는 냄새, 본 적 없는 얼굴들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분명 내 안에 있었다.
인식은 경험의 축적이 아니라, 내면의 울림에 따라 솟아오르는 감각의 기억이다. 시는 나의 무의식과 인식이 마주한 자리였고, 그 문장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던 인식의 얼굴이었다.
나는 인식을 ‘내면화된 외부’라 부른다.
처음에는 나와 무관했던 것이 어느새 내 안으로 들어와 나를 구성한다. 감정의 파편들이 쌓이고 기억의 결이 스며든 자리에 인식이 머문다. 가장 타자적인 것이 가장 친밀한 나의 일부가 되는 것, 그 과정은 아름답고도 위험하다. 왜곡된 인식은 자아를 일그러뜨리고, 정직한 인식은 사랑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지만, 진정한 관계는 인식의 깊이에서 갈라진다. 너를 보는 나의 방식이 너를 지우기도 하고, 평생 새기기도 한다. 인식은 단지 ‘보는’ 일이 아니라 ‘살리는’ 일이다.
그렇기에 인식은 마음의 구조에서 가장 민감한 지점이다. 그것은 시작이자, 되돌릴 수 없는 각인이며, 마음 전체의 색조를 바꾸는 첫 스침이다. 인식이 의식의 빛 아래에서 일어날 때, 우리는 비로소 깨어 있는 존재가 된다. 인식은 기억보다 빠르고, 감정보다 깊으며, 생각보다 먼저 움직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인식하고 있다.
이 글을 쓰는 나,
이 글을 읽는 당신,
그리고 이 순간의 공기와 정서들을.
인식은 내가 여기에 있다는, 가장 명료한 증거다.
“나는 여기 있고, 너는 여기서 본다.”
그러나 인식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받아들여진 감각과 감정은 곧 의미를 갈망하고, 그 의미를 찾아내려는 움직임 속에서 생각으로 이어진다. 인식이 세상의 첫 빛이라면, 생각은 그 빛 위에 질서를 새기는 손끝이다.
이제 마음은 단순히 받아들이는 데서 멈추지 않고, 받아들인 것을 재구성하며 새로운 구조를 세운다.
인식은 단지 ‘보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내면에 새기는 섬세한 초대이다.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마음은 다른 색을 입고, 자아는 다른 이야기를 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인식의 방식대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