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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존재 관찰 일기

존재와 존재가 만나 하나의 울림을 만들다

by 영업의신조이

4화.

지옥 아이


“이데올로기의 심연 속에서 순수를 지키려는 존재의 투쟁”




세상은 아이들에게 너무 이르다.

그들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선택되고, 자라기도 전에 평가받는다. 이름이 불리기 전에 사회는 그들을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의 눈이 뜨이기도 전에 교육 시스템은 그들을 향해 문을 열어젖혔고, 사랑이라 불리는 말속에는 이미 규율의 명령이 숨겨져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개인의 성장기가 아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하게 진화한 이데올로기의 시대, 시스템화된 사유의 감옥 속에서 자아를 잃지 않으려 애쓰는 우리 아이들의 투쟁이다.



이제 사회는 이전의 왕권도, 종교도, 자본도 뛰어넘었다.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단일한 교리를 외치는 설교자의 목소리가 아니다. 학교의 커리큘럼 속에, 뉴스의 문장 속에, 부모의 걱정과 우려 속에, 심지어 아이의 스마트폰 알림과 모니터링 제어 속에 스며들어 있다.


안타깝지만 이 시대는 이미, 보이지 않지만 모든 곳에 경쟁과 비교, 그리고 판단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공기처럼 존재하며, 우리는 그것 없이는 숨 쉴 수 없는 듯 길들여져 살아간다. 그러나 그 공기는 점점 짙어지고, 우리 아이들은 그 속에서 천천히 질식해 가고 있다.



공부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멈춰 있으면 뒤처지는 시대.

학교는 경쟁의 구조를 학습시키고, 가정은 불안을 합리화하며, 사회는 속도의 언어로만 그들에게 말한다.


이렇게 신 이데올로기는 ‘너를 사랑한다’는 습관이라는 형태로 진화해 왔다.


그것은 과거의 독재처럼 폭력적이지 않다.

오히려 너무 부드럽고, 너무 자연스럽다. 그래서 더 무섭다. 사람들은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고, 교육이라 부르고, 책임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동일한 명령이 숨어 있다.


“너는 이 틀 안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아이들은 이제 그 틀 안에서 자라며 자신을 잃어간다.

그들의 ‘싫어’, ‘하기 싫어’, ‘나 혼자 있고 싶어’라는 말은 게으름의 언어가 아니라 자유의 절규다.


그들은 반항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으려는 것이다. 순수는 이 신 이데올로기의 가장 큰 적이다. 그리고 그 순수를 지키려는 존재는 언제나 사회로부터 가장 먼저 오해받는다. 그러나 그 반항은 시대의 반작용이다. 신 이데올로기가 진화할수록, 그 반작용은 더 강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질은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 반작용은 단순한 거부가 아니다.

이데올로기의 압력이 강해질수록 인간 내면의 자유 본능은 더 강렬하게 반응한다. 그것은 마치 중력과 탈주의 역학 같다.


억압이 커질수록 자유는 더 강하게 밀려오고, 그 긴장은 결국 새로운 의식의 탄생을 이끈다. 아이의 반항은 바로 그 ‘탈주 본능’의 증거다. 그는 질서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이 반작용은 필연이며, 그것이야말로 인류 의식이 스스로를 갱신하는 유일한 진화 방식이다.



이 아이들은 지옥 속에서 태어났다.

그 지옥은 불길도, 쇠사슬도 아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규범, 측정 가능한 사랑, 비교로 정의되는 행복이다.

아이는 사랑받기 위해 자신을 포기하고, 인정받기 위해 자신을 감춘다.

그렇게 세상은 순수를 길들인다.


아이는 시스템의 기어로 변하고,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간다.

그러나 잃어버렸다는 걸 자각하는 순간, 그는 깨어난다.

그 깨어남이 바로 반항이다.

그 반항이 바로 존재의 진화다.



부모는 종종 그 반항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것은 파괴가 아니라 성장이다.

아이의 반항은 어른이 만든 세계에 대한 정직한 질문이다.


“왜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하나요?”


그 물음이 철학의 시작이다.

그 물음을 억누르는 순간, 사유는 죽는다.

부모가 해야 할 일은 아이를 다시 틀 속으로 밀어 넣는 것이 아니라, 그 물음 앞에서 함께 침묵하는 일이다. 그 침묵이 아이에게는 숨 쉴 틈이 되고, 세계를 다시 바라볼 수 있는 여백이 된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가르치고, 너무 적게 들어준다.

그러나 진짜 교육은 지식을 채워 넣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공간을 허락하는 일이다. 철학은 먼 곳에 있지 않다.


공원 벤치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며


“왜?”


라고 묻는 아이의 목소리 속에 있다. 그 목소리를 그대로 들을 수 있을 때, 부모는 비로소 어른이 된다. 그리고 그 순간, 사회는 조금 덜 잔인해진다.



이 시대의 아이는 어쩌면 인류가 만들어낸 모든 시스템의 거울이다.

그의 혼란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집단의 반성이다.

그의 고독은 병이 아니라 의식의 시작이다.

우리가 아이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단지 그를 위로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를 되돌아보는 일이다. 그가 반항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자유를 갈망하는지 깨닫게 된다.



지옥 아이.

그는 불행한 존재가 아니다.

그는 인류가 아직 완전히 길들이지 못한 마지막 순수의 증거다.


그의 싸움은 어리석은 저항이 아니라 존재의 본능적인 회복이다.

그는 울며 태어나지만, 그 울음은 절망의 울음이 아니라 생명의 선언이다.


그의 눈빛에는 여전히 사유의 불꽃이 남아 있다.

그것이 꺼지지 않는 한, 우리는 아직 희망을 말할 수 있다.



세상은 그들을 지옥에서 살도록 만들었지만,

그 아이는 그 지옥 속에서 천천히, 그러나 단단하게 자기 자신으로 피어나고 있다.


그의 반항은 인류가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의 진화가 낳은 또 하나의 변증법적 진화이며, 그의 눈빛은 여전히 순수를 향해 있다. 그는 그 누구보다 순수한 투쟁자이며, 그의 싸움은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가 잃어버린 ‘자유의 기억’을 되찾으려는 시도이다. 그가 울며 세상을 거부할 때, 그 울음은 결코 부정이 아니라 선언이다.


“나는 나로 존재하겠다.”


그 말은 이 시대의 모든 철학자가 다시 써야 할 문장이다.



지옥은 불 속에 있지 않다.

그것은 순수를 잃은 세상이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은 그 속에서 여전히 빛을 향해 손을 뻗는다.

그의 손끝이 닿는 그 미세한 빛의 흔들림 속에, 인류는 다시 태어날 것이다.



“지옥은 불 속에 있지 않다.

그것은 순수를 잃은 세상이다.

그리고 아이는 그 속에서, 여전히 아기 천사를 꿈꾼다.”



지옥아이 by 영업의신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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