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전장
금 간 그릇
그릇 하나 들고
오래 걸어왔습니다
물을 채울수록
금 간 틈으로
먼저 흘러내렸습니다
나는 자꾸 채우려 했습니다
비어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마음속 욕망은
손바닥에 돋은 피비늘처럼
젖은 채 미끄러져
떨어져 나갔습니다
어느 날
나는 그 그릇을
조용히 흙 위에 내려놓았습니다
흙은 말이 없었고
말 없는 것들이
오래 나를 붙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물을 채우지 않고
비워 둔 채
밤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별빛이 내리고
금 간 자리마다
조용히 고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깨졌다는 것은
끝났다는 뜻이 아니라
빛이 들어올 자리가
생겼다는 뜻이라는 것을...
이제 나는
그릇을 고치지 않습니다
다만
깨진 채로
조용히
빛을
담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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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는 @마리폴네르 작가님의 '한개의 그릇'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쓰여진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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