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유명 영어강사가 되다

by 조이 킴



섬마을에서 온 영어 열등생


나는 한국에서 20여년 동안 영어 학원을 운영하면서 영어 강사로 일했다. 그리고, 올해 햇수로 5년째 뉴질랜드에 살고 있으며, 작년에는 캔터베리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렇게 나열하고 나니, 나의 영어 실력이 무척이나 훌륭할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줄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화려한 약력 뒤에 있는 진실은 조금 다르다. 20년 경력에 빛나는 강사로서 영문법과 독해에서는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실력을 갖췄지만, 뉴질랜드로 이민을 오기 전까지만 해도 내 영어 말하기 실력은 꽝이었다. 토익 점수가 900점이 넘고, PBT(Paper Based Test) 토플 점수가 600점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어 회화 실력에 대해서만큼은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의사소통이 안되는 높은 영어 점수라니 시쳇말로 쪽팔리고 속이 상했다.


내 영어가 이런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나는 남해안 섬마을의 작은 중학교를 다니며 영어를 처음 만났다. 내 생애 첫 영어 선생님은 수업 시간 내내 자신의 소개팅과 연애 이야기만 해대던,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총각 선생님이었고, 그 다음해부터 2년 연속으로 만난 영어 선생님의 수업은 정말 너무나 지루했다. 나의 중학교 시절 영어 공부는 교과서의 본문을 암기하는 것이 전부였다. 일단 본문 암기만 잘 하면 어느 정도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기에 그 이상을 배우고자 하는 열망도 없었다.


이후 육지로 고등학교 유학을 떠난 첫 해 첫 영어 수업 시간. 그 때 받은 충격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날 배운 내용은 'to 부정사의 시제'였다. 'to 부정사'라는 단어도 처음 들었는데, 그 시제를 이해 하려니 이건 마치 기는 아이가 달리기를 배우는 격이었다. 바로 그 주말에 서점에 가서 중학교 영문법 책을 사왔다. 고등학교 1학년이 영어 기초를 다시 배워야 하는 상황에서, 학원도 과외도 없이 혼자서 해야만 했던 영어 공부는 그야말로 맨 땅에 헤딩하는 격이었다. 그렇게 고등 학교 3년 내내 영어 과목은 내게 혼돈의 늪이었다.


기초부터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고등학교 때는 나름대로 '영문법'을 열심히 공부했다. 그렇게 중고등학교 6년 동안 나는 영어 오디오 파일 하나 없이 책으로만 영어 공부를 했다. 그런데 웃기게도 고등학교 영어 시험이나 학력고사에는 영어 발음과 강세를 묻는 문제가 있었다. 그러니 나는 소리값을 소리 없이 암기로 배워야 했다. 영어 성적은 갈수록 좋아졌지만, 영어 말하기란 여전히 내게 유니콘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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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유명 영어 강사가 되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영문법의 혼돈 속에서 그때 그때 배우는 영어 지식들을 머리에 우겨넣으며 학력고사를 치렀다. 그리고 대학생이 되자, 너무 자연스럽게 영어 과외 선생님이 될 수 있는 자격이 내게 주어졌다.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니 기초부터 다시 영어를 훑어갔고, 그때 처음으로 제대로 영어 문법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학 등록금을 스스로 벌어야 했던 가난한 고학생에게 '영어 회화 학원'까지 다닐 금전적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나뿐 아니라 모두들 나와 비슷한 방식으로 영어를 공부했고, 나와 비슷한 방식으로 영어를 잘하고 싶어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영어 말하기를 못한다는 열등감을 묻어두고, 나는 영어 과외 선생님에서 영어 학원 강사로 커리어를 확장해 나갔다.


중고등학생 시절에 영어 때문에 힘들어하던 경험은 나로 하여금 훌륭한 문법 선생이 되게 해주었다. 영어 학원 강사 초창기 시절 나는 우연한 기회로 한 일간 신문사의 평생학습 문화센터에서 성인들에게 영문법을 강의했는데, 당시 수강생들은 내 강의가 가려운 등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것 같다고 평했다. 그동안 2%가 부족해서 헤매던 부분을 내가 쏙쏙 뽑아 명쾌하게 설명해 준다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당시 나는 아줌마 팬들이 꽤 많았다.


아줌마 팬 분들 덕분에 입소문이 나고, 나를 찾아 오는 학생들이 늘어나면서 나는 내 이름을 건 영어 학원을 열었다. 영어 학원 사업은 줄기차게 확장이 되었다. 여전히, 일에 치이며 또 결혼하고 나서는 육아에 치이며 영어 회화 공부를 따로 할 시간이 없었다. 영어 강사로서 유명해질수록 영어 말하기를 못한다는 데에서 오는 열등감은 커져만 갔다. 영어 강사로서 또 프로 직업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갉아먹는 큰 원흉이었던 것이다.








같은 영어 맞아?


그러던 와중에 나는 이 곳 뉴질랜드로 이민을 왔다. 뉴질랜드로 이민을 온 후 처음 두 세 달은 집을 보러 다니고, 생활 용품을 구하는 등 바쁘게 지내면서 현지인들과 말할 기회가 많았는데, 예상과는 달리 크게 문제없이 소통이 되었다. 간단한 생활 영어니 어렵고 복잡하게 말할 필요가 없기도 했고, 내가 돈을 쓰는 입장이니 그렇지 않아도 친절한 뉴질랜드 사람들이 얼마나 더 인내심 있고 친절했겠나?


그러다 현지인들과 진짜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다보니 예상치못한 난감한 문제 하나에 봉착했다. 그것은 바로 강한 뉴질랜드 액센트였다. 난생 처음 와 본 뉴질랜드에서 내가 배운 영어와 다른 영어를 접하면서 신기해하고 웃던 것도 잠시, 강한 뉴질랜드 악센트로 인해 곤란함을 많이 겪었다.


한번은 정말 웃지못할 헤프닝이 있었다. 후아니타 집에서 에어비앤비로 있은 지 3일째 되던 날, 뉴질랜드에서는 차 없이 살아보겠다는 야무진 꿈을 단 3일 만에 버리고, 자동차를 구입하러 갔었다. 고맙게도 후아니타가 자기 차로 직접 나를 중고차 딜러샵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서 나는 제대로 충격을 받았다. 나를 도와주던 뉴질랜드 현지 딜러의 말을 조금의 과장없이 나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후아니타는 미국 출신이어서 굉장히 알아듣기 쉬운 표준 미국식 영어를 구사했다. 그래서, 후아니타가 뉴질랜드 영어를 미국식 영어로 통역해 주었다. 세상에 영어를 영어로 통역하다니…. 정말 웃펐다.


뉴질랜드 악센트라는 큰 산이 있긴 하지만, 어찌됐건 문 밖만 나가면 모두 영어를 사용하는 환경인 데다가 특히 이민 첫 해, 유학생 엄마로서 시간이 넘쳐 났으니 이젠 정말 내 영어 회화 실력을 올릴 기회라고 생각했다. 일단은 적극적으로 영어의 바다에 나를 던져 보기로 했다.


그런데 한국에서 예상했던 것만큼 영어를 일상에서 말할 기회는 그렇게 많이 주어지지 않았다. 초기 정착을 끝마치고 나니 수퍼마켓에 가는 일을 빼고는 특별히 현지인들을 만날 일이 별로 없었고, 아이들을 9시까지 학교에 데려다 주고 나면 학교가 끝나는 3시까지는 나 혼자였다. 친인척도 친구도 아는 사람도 없는 타국이니 나는 갈 곳도 없고, 영어로 말을 붙일 사람도 없었다. 도서관에 가는 것도 하루 이틀.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을 붙잡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온통 영어로 말하는 현지에서 최대한 영어에 많이 노출되며 자연스럽게 영어 말하기를 늘려보고자 하는 열망은 너무 일찍 난관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물러서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인 것은, 시간이 짐이 될 만큼 많이 남아 돌았다.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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