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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도리

삶의 온기

by DEN

시골과 도시의 풍경이 수없이 반복되는 외곽지에도 겨울이 찾아왔다. 한파였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 더 추웠다. 해는 이른 시간임에도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인간의 시간으로 오후 4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다. 한기를 잔뜩 품은 황혼의 주황빛이 사람들을 재촉하는 한편, 살을 에워싸는 차가운 바람이 사람들을 막아섰다. 목적지도, 방향도 없이 몰아치는 바람은 날카롭다시피 느껴졌다.

이런 날씨 속에 한 명의 장년 남성이 유치원의 입구로 들어갔다. 건물 안으로 들어간 남성은 선생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중 한 명의 선생이 어린 여자아이 하나를 데리고 나왔다. 남성의 딸인 듯 했다. 딸은 웃음 지으며, 큰소리로 아버지를 불렀다. 그러고는 아버지에게 달려가 안겼다. 아버지는 딸을 한 번 안아주더니, 선생에게 인사를 시켰다. 딸과 아버지는 유치원 선생들과 인사를 주고받고 거리를 나섰다.

거리는 여전히 추웠다. 거센 바람이 모녀에게도 불었다. 딸은 하얀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손에는 노란색 벙어리 장갑 씌워져 있었다. 아버지는 목도리는 없었고 검은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다.

모녀는 도시의 풍경이 펼쳐지는 거리를 걷다가 하나의 교량에 이르게 되었다. 그 교량은 시골에서 볼 수 있는 작은 하천의 교량보다는 훨씬 컸으나, 도시에서 ‘대교’라고 불리는 크기의 교량보다는 한참 작았다. 아래의 강은 추운 날씨 탓에 완전히 얼어 있었다. 그 위로 남자아이들이 장난삼아 던져놓은 듯한 돌멩이 몇 개가 표면을 장식했다.

교량의 중간쯤 왔을 때, 딸아이는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큰 이유는 없었다. 부모를 향한 어린아이의 이유 없는 투정이었다. 딸은 목도리를 벗더니 이리저리 흔들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그 행동을 만류했지만, 딸은 멈추지 않았다.

그 순간, 굉장히 강하고 빠른 바람이 한 번 불었다. 이 바람에 그만 아이는 목도리를 손에 놓쳐버렸다. 목도리는 교량 아래로 떨어져 돌멩이들과 함께 언 강의 얼음 표면을 장식했다. 아이는 소리를 지르며, 교량 아래를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교량 아래로 내려갈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서러운 표정으로 목도리만 쳐다보고 있는 아이를 저지했다.

“위험해, 거기서 나와.”

“하지만, 목도리가…”

“어차피 못 찾아와. 가자.”

딸의 얼굴은 울상이 되었다. 목도리를 잃은 이후 아이의 투정은 더 심해졌다. 아버지는 계속 아이를 좋게 타이르며, 가던 길을 이어갔다. 이런 모녀의 사연에도 바람은 계속 불었다. 안 그래도 추운 날씨에 불어오는 거친 바람은 뼈가 시릴 정도의 한기를 느끼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코트의 깃을 여미었고 딸은 패딩의 모자를 깊게 덮어썼다.

“아빠, 추워.”

“조금만 더 가면 되잖아. 조금만 참자.”

“목도리…”

“집에 가면 새로운 목도리 하나 사줄게.”

“하지만 지금 춥단 말이야. 목도리…”

“네가 목도리를 흔들다가 잃어버린 거잖아. 참아.”

“내가 안 그랬어. 바람이 그랬어.”

“그래, 목도리 새로 사줄게. 다음부터는 바람이 빼앗아 가지 않게 잘 메고 있어.”

“지금… 목도리… 춥단 말이야!”

아이는 또다시 소리를 질렀다. 울상이었던 아이의 얼굴에는 어느새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이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이는 장갑을 낀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고 아버지는 걸음을 멈추고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아이를 달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는 계속 이런저런 말로 타일렀지만 아이는 고개만 흔들 뿐이었다.

한편, 저 멀리 뒤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던 소녀가 있었다. 교복 위에 패딩을 입고 있었는데, 숙녀에 가까운 모습이었으나 아직 앳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10대 후반쯤 되는 것 같았다. 목에는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고 장갑이 없는지 패딩의 주머니 사이로 손을 넣고 걷고 있었다. 소녀와 부녀 사이에는 꽤 거리가 있었으나, 아이가 목도리를 떨어뜨리고 투정을 부리는 동안 가까워졌다.

소녀는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보더니 잠깐 옛 기억을 더듬었다. 어렸을 적, 지금 울고 있는 아이와 거의 비슷한 나이였을 무렵에 일이다. 지금과 달리 여름이었다. 지금과 비슷한 교외의 거리를 걷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비가 내렸다. 쏟아졌다. 소나기였다. 한참 많은 비가 내렸는데, 우산이 없었다. 장난을 치다가 망가뜨린 것인지, 잃어버린 것인지, 애초에 들고 나오지 않았던 것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찌 됐든 비를 피해야 했고 어떤 건물 아래로 뛰어 들어가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부모님께 전화라도 할 수 있었겠지만, 그 시절에는 그런 것도 불가능했다.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 쏟아지는 비에 실내로 들어가 버린 듯했다. 서러운 마음에 움츠리고 앉아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움츠려 울고 있는 소녀에게 한 남자 청년이 다가왔다. 그는 한 손에는 깨끗하고 튼튼해 보이는 하늘색 우산을 접어 들고 있었고, 한 손에는 녹슬고 거의 망가져 잘 펴지지도 않을 것 같은 투명을 펴서 들고 있었다.

청년은 아이를 불렀다. 움츠렸던 고개를 펼치고 그 청년을 쳐다보았다. 청년은 소녀에게 하늘색 우산을 건네주었다. 소녀는 받아도 되는지 불안해하며 주위만을 살폈다. 청년은 우산이 두 개라서 무겁다며, 들고 가달라고 부탁했다. 소녀는 우산을 집어 들고도 여전히 불안해했다. 청년은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내가 우산을 주는 대신에 혹시 삼촌이랑 약속 하나만 해줄 수 있어?”

“약속…이요?”

“응, 혹시 네가 나중에 커서, 지금 너처럼 울고 있는 아이를 보면 도와줄 수 있어?”

“네!”

“그래, 이 우산은 네가 가져가고 대신에 네가 나중에 어른이 되면 다른 아이를 도와주는 거다? 약속.”

“약속!”

그렇게 소녀는 떠났고 청년은 소녀가 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떠났다. 청년이 들고 있었던 투명 우산은 망가져 펴지지 않았다. 하지만 청년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옛 기억을 떠올린 소녀는 아이에게 다가가더니 목도리를 풀고 꼬마의 목에 걸어주었다.

“꼬마야, 많이 춥니? 어때? 따뜻하지?”

소녀의 온기가 담긴 목도리는 따뜻했다.

“응.”

“언니 목도리 쓰고 갈래?”

“그래도 돼요…?”

“당연하지.”

이 모습을 보던 남성이 당황했다.

“학생, 마음은 고마운데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아, 괜찮아요. 이 아이가 너무 귀여워서 그런 거예요.”

“그러면, 목도리값이라도 드릴게요.”

남자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현금을 건네주었지만,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제가 어렸을 때, 이 아이처럼 울고 있었던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어떤 삼촌이 와서 도와주더라고요. 그러면서 대신에 어른이 되면, 나처럼 울고 있는 아이를 도와주라고 약속했었어요. 아직 어른은 아니지만 오늘이 그런 날인 거 같아서요.”

남성은 큰 충격을 받았다. 남성도 소녀와 비슷한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남성은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잘 커 줘서, 그리고 기억해 줘서 고맙다.”

“네!?”

그러고 보니 그 남성의 모습은 소녀가 어렸을 적 보았던 청년을 닮아있었다. 소녀는 잃어버린 가족을 찾은 것처럼 기뻐했다.

“내 딸 하고도 약속해야지.”

남성의 말에 소녀가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이름이 뭐예요?”

“연서요…”

“연서, 언니랑 약속 하나 해줄 수 있어요?”

“약속이요?”

“응, 연서가 나중에 커서 어른이 되면, 언니처럼 다른 아이 도와줄 수 있어요?”

“어떻게요?”

“오늘 언니가 했던 것처럼 도와줄 수 있어요?”

“목도리를 줘야 해요?”

“아니, 그냥 도와주면 돼요.”

“그러면, 이 목도리는 받아도 되는 거예요?”

“응.”

“네!”

“그럼, 언니랑 약속.”

“약속~”

“언니랑 뭐 약속했어요?”

“나중에 어른 되면 다른 아이 도와주기!”

아이는 대답과 함께 해맑게 웃었다. 덩달아 소녀에게도 미소가 떠올랐다.

“목도리 마음에 들어요?”

“네! 엄청 엄청 예뻐요.”아이는 소녀를 한 번 보더니 이어 말했다.

“언니도요!”

소녀는 방긋 웃었다.

“고마워요. 다음부터는 목도리 가지고 장난치면 안 돼요. 이 목도리 잃어버리지 말고 잘 가지고 있어야 해요~”

“네!”

소녀는 굽혔던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남성은 흐뭇한 듯 미소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 약속 지켰어요~”

“약속보다 훨씬 더.”

“연서야, 언니한테 감사해요, 인사해야지~”

"감사합니다~”

아이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소녀는 먼저 갈 길을 떠났다. 남성은 딸과 걸으며, 생각에 빠졌는데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남성도 청년 시절에 아이를 도와준 적이 있었다. 추워하는 남자아이를 보고 핫팩을 주면서, 비슷한 말을 했었다. 하지만 그 남자아이는 남자였고 울고 있지도 않았다. 정확히 이 소녀가 어떤 도움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도와준 남자아이는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남성에게도, 소녀에게도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교량 아래에서는 여전히 하얀 목도리가 놓여 있었다. 한참을 바람에 펄럭거리다가 소녀와 부녀가 교량을 떠난 뒤 움직임을 멈추었다. 마치, 임종을 거둔 사람의 모습처럼 고요하고 잠잠했다. 자신의 역할을 다 끝내고 영면에 임한다는 듯.

언 강의 표면 위, 온갖 잡다한 색깔에 배열 속 순백의 목도리만이 돋보였다. 목도리는 세상에 대한 어떤 상징처럼 보였으나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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