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온기
퇴근을 위해 버스를 탔다. 보통 퇴근할 때면, 혹은 퇴근에 가까운 시간이 되면 소설을 쓰는 것을 멈춘다. 그러고 나면 흐름이 깨진다. 그 상태에서 버스를 타면 딱히 다른 걸 하고 싶지가 않다. 애초에 퇴근길도 길지 않다. 대부분 버스에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다가 몇 안 되는 정류장을 지나면 내린다.
하지만 오늘은 딱 퇴근 시간이 될 때까지 소설을 쓰다가 급하게 퇴근 준비를 했다. 그래서인지 흐름이 깨지지 않았다. 앉을 자리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소설을 이어서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 타야 할 버스가 왔고 바로 탔다. 항상 한두 자리씩 비었었는데, 오늘따라 빈자리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기둥 하나를 대충 걸치고 휴대폰을 꺼냈다. 하던 대로 안경도 벗어 안경집에서 넣은 뒤, 주머니에 넣었다. 그렇게 휴대폰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이라고 하더라도 한 문단이라도 더 쓸 수 있으면 좋으니까.
한참, 한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기에 잠깐 집중해서 소설을 쓰고 있었는데, 다음 정류장을 도착했다. 흐릿한 시선으로 주위를 보니, 정확히는 2개의 정류장을 지나온 듯했다. 다시 휴대폰 화면으로 시선을 옮기려는데 헤드셋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사이로 어떤 말소리가 들려왔다. 버스에 탈 때 나의 또래처럼 보였던 한 여자가 마침 버스에 탑승한 할머니께 자리를 양보하려는 것 같았다.
잠깐 하던 일을 멈추고 신경을 기울였다. 그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할머니께 앉으시라고 권했다. 할머니는 괜찮다며, 안쪽으로 들어가셨다. 헤드셋을 끼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다정함과 상냥함이 가득한 진심에서 나오는, 듣기에도 기분 좋은 목소리였다. 안경 없는 풍경은 흐릿했지만, 그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미소와 웃음이 가득 서린, 외모와는 상관없이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는 얼굴이었다.
할머니는 뒷자리에 앉으셨고 그녀는 다시 본인의 자리에 앉았다. 무심결에 미소가 나왔다. 덩달아 마음이 따뜻해지고 기분이 좋아졌다. 헤드셋을 벗었어도 좋았을 텐데. 그녀의 따뜻한 목소리를 제대로 들어보고 싶었다. 안경을 썼어도 좋았을 탠데.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제대로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난 예술지상주의자다. 하지만 데카당스는 아니다. 난 때때로 삶과 운명을 경멸한다. 하지만 삶과 운명의 모든 순간을 혐오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예술만큼이나 그것을 사랑하고 있다. 예술을 하기에는 삶과 인간, 일상을 너무 사랑하고, 이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에는 예술을 너무 사랑한다. 그리고 난 끊임없이 삶과 예술의 경계를 횡단하고 있다.
난 여전히 예술의 가치를 믿는다. 내가 사랑하는 소설가처럼, 예술을 위해서라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 수도 있다. 예술은 고귀한 것이며, 아름다운 것이며, 세상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때론 삶의 사소한 순간이 예술보다 더 큰 감흥을 준다. 때론 누군가의 따뜻한 행동이 예술적인 작품보다 더 큰 감동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