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들은 우리와 참 많이 닮았구나(1)
늦은 여름, 비가 왔다. 처음에는 약간의 비가 내려 별생각이 없었는데 점차 많은 비가 왔다. 나의 머리와 옷이 점점 젖어갔다. 일기예보에서 비가 온다고 했지만,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 비를 맞든 안 맞든 달라지는 것은 없다. 어차피 집에 가서 말리면 그만. 사람도 그렇다. 관계를 맺든 안 맺든 끊으면 그만. 혹은 끊어지면 그만. 귀찮게 우산을 챙길 필요도 귀찮게 사람을 만날 이유도 없다.
한참 걷다 보니, 한 커플이 하나의 우산을 쓴 채 나를 이상한 듯 쳐다봤다. 나는 저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비를 맞는다고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는데 왜 비 맞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볼까. 저들은 비와 같다. 언젠가 그친다. 저들도 언젠가는 헤어진다. 시간이 문제일 뿐. 하데스는 저들의 영원한 시간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하데스까지 갈 것도 없겠지만…
쓰레기를 버려두는 곳을 쳐다보니 너무 녹슬어 펴지지 않을 것 같은 우산이 하나 보였다. 너무나 평범한 투명색 우산이었다. 가만히 우산을 쳐다보는 와중에 빗줄기는 더욱 거세졌다. 이제 내 머리와 몸은 완전히 젖었다. 저 우산을 더 이상 누구에게도 쓰이지 않고 땅에 묻혀 버려지겠지. 우산이 땅에 묻힐 모습을 하며, 한참을 쳐다봤다. 빗소리에 묻혀 잘 들리는 않았지만 뭔가 말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확실하게 들렸다. 그건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저는 이제 어떻게 해도 펴질 수 없을 만큼 녹슬었고 쓸모가 없어요. 버려지기만 기다리고 있어요. 아니요, 이미 버려졌어요. 아무도 보지 못할 곳에 묻혀 산산이 부서지기만을, 분해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요. 제가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자비는 저의 비참한 모습을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해달라는 것뿐이죠.
저도 한 때는 누군가를 위해 제 몸을 펼쳤었어요. 그가 젖지 않도록 그를 감싸주었죠. 한때는 유용한 존재였어요. 하늘에서 많은 비가 내리는 날이면 그는 저를 손에 쥐고는 밖으로 나갔죠. 그리고 밖에서 저의 몸은 펼쳐지고 밖으로는 차가운 비를 맞으며, 안으로는 그의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어요.
처음의 만남은 모든 만남이 그렇듯 운명적인 만남이었어요. 공장에서 만들어진 뒤 저는 어떤 박스에 실려 어디론가 옮겨졌어요. 대학교 앞 편의점이었어요. 그는 허겁지겁 뛰어 들어오더니, 저를 손에 쥐더니 곧바로 저를 선택해주었어요. 이미 적지 않은 시간을 비에 젖었는지 그의 머리와 어깨는 축축하게 젖어있었어요.
생각했었어요. 이제 제가 있으니까 이 사람은 비의 젖지 않을 거라고, 그의 몸에 떨어지는 빗방울은 내가 막아낼 거라고. 나도 이제 누군가에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될 것이라며, 기뻐했어요. 누군가를 위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정말 신의 은총, 축복이라고밖에 말하는 것 외에 달리 다른 방도가 없잖아요. 그런 축복이 내게 주어지는구나.
그와 함께하는 시간은 너무나 즐거웠어요. 비록, 많은 시간을, 자주 함께하지는 못했어요. 그렇다고 하늘께 자주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하지는 않았어요. 너무나 이기적인 생각이잖아요. 비가 오면 그는 힘들 테니까요. 대신 그와 함께하는 잠깐의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기로 했어요. 그가 아주 조금의 비라도 맞지 않도록 최대한 비를 막아냈어요. 그게 저의 가치이고 제가 누군가를 위한 존재가 될 수 있는 순간이잖아요.
그가 집에서 학교에 갈 때, 공원을 가서 산책할 때, 친구를 만나기 위해 도시를 갈 때, 비가 오는 날이면 항상 함께했어요. 한 번은 그의 여행길에 따라가 정말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기도 했었어요. 또 한 번은 학교에 저를 놔두고 가서 다시 그를 보지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하다 지치기도 했었어요. 긴 시간 뒤에 그를 본 순간, 그의 손의 제 몸이 쥐어진 순간, 그 감격을 저는 아직 잊지 못해요.
모든 아름다운 시간들이 그렇듯 그 시간은 길지 않았어요. 그 시간들은 제가 지닌 가치만큼 짧았어요. 어쩌면 그보다 길었는지도 모르겠어요. 한 번만 쓰여지고 버려지기도 하고 심지어는 한 번도 쓰여지지 못하고 버려지는, 전체의 삶 속에서 한 번도 누군가를 위해 반짝이는 순간 없이 사라지는 우산도 있으니까요. 그에 비하면 전 정말 축복받았다고 생각해요. 이토록 평범한, 길거리에 흔하디흔하게 볼 수 있는 우산치고는요. 하지만 운명이 주는 시련 중 가장 큰 시련은 옛날에 행복했었다는 것이라고 하잖아요.1)
하루는 비가 오는 듯 안 오는 듯, 누군가를 적시기에는 충분하지 않을 구슬비가 오는 날이었어요. 그날도 늘 가던 공원으로 산책하러 나갔는데, 처음 그는 저를 펼쳐 비를 막다가 비가 그치지 않았는데도 저의 몸을 접고는 비를 맞았어요. 맞기에 좋을 만큼 비가 내렸던 것 같아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모든 비를 막아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비가 내린다고 꼭 맞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다시 많은 비가 오는 날이면 그를 위해 제 몸은 펼쳐질 테니까.
또 하루는 화창한 날이었어요. 당연히 그는 저를 손에 쥐지 않은 채 밖을 나갔어요. 한참의 시간이 지나 비가 내리기 시작했어요. 그는 다른 우산을 손에 쥔 채 돌아왔어요. 혹시 그가 앞으로 나를 쓰지 않으면 어떡하지. 저 우산만 쓰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이 들자, 너무나 불안했어요. 다행히도 그는 저를 잊지 않았어요. 물론 새로 온 우산을 쓰는 날도 많았지만 가끔씩은 저를 손에 쥐고 나갔어요. 저는 아름다운 시간들이 줄어드는 만큼 그 시간들을 더 소중히 여겼어요.
그러던 어느 날, 비가 오지 않는데 그는 저를 손에 쥐고 공원으로 나갔어요. 그는 어느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누군가를 기다렸어요. 조금 있다가 비가 내리기 시작했어요. 구름이 가득 하늘을 덮고 있지만 그리 어둡지는 않고 약간의 빛을 머금은, 비는 추적추적 내리는 것 같지만 이상하리만치 상쾌함을 머금은, 만약 비가 오는 날이 기분 좋게 여겨질 수 있다면 바로 오늘이라고 말할 수 있을 좋은 날이었어요.
그렇게 비가 오고 몇분이 지나자, 먼 곳에서 어떤 여자가 손을 흔들고 있었어요. 한 손은 우산을 쥔 채. 한 손은 들어서 흔들었어요. 그는 저를 등 뒤로 숨기더니, 갑자기 저를 던져버리고 그 여자에게 뛰어갔어요. 몇 분 뒤에 그는 제 옆을 지나갔어요. 그는 그녀가 가진 우산 아래에서 함께 비를 피하고 있었어요. 그때 깨달았어요. 이제 나의 가치는 끝이구나. 그를 원망하지는 않았어요.
전 그 둘을 빛낼 만큼 아름답지도, 모두 안을 만큼 크지도 못했으니까요.
어제는 꿈을 꾸었어요. 버려진 제 몸이 어디론가 옮겨지더라고요. 주변에는 저처럼 버려진 존재들이 가득 쌓여있었어요. 우리의 몸 위에 흙이 한 줌, 한 줌, 또 한 줌. 그러다가 땅속 깊숙이 묻혀 버려진 존재들과 함께 썩어갔어요. 이게 예지몽이라고 부르는 꿈일까요? 그 꿈에서 깨자 이곳이었어요.
보시다시피 저는 이제 몸을 펼칠 수도 없어요. 비를 막을 수도 없어요. 이제 저의 가치는 없어요. 이제 누군가의 온기를 느낄 수도 없어요. 제가 꾸었던 꿈처럼 어딘가에 버려져 흙이 한 줌, 한 줌, 또 한 줌 뿌려지는 것을 쳐다보다 묻혀 어둠 속에서 분해되어갈 뿐이죠."
쓸모없으면 버려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 물건도 인간도. 그저 존재했다는 것도 모르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존재. 쓸모 있을 때는 부드러운 시선과 따뜻한 말이 내 앞에 다가오지만 쓸모가 없어진다면 경멸하는 시선과 혐오의 말, 무관심이 내 옆과 뒤에 떨어진다.
인간이란 비곗덩어리에 불과한 존재. 이름조차 없는, 비곗덩어리. 그것이 인간의 본성.
아직도 울고 있을까? 난 그 눈물조차 얼어버렸구나. 그래, 눈물조차 흘리지 않는 비곗덩어리. 모든 인간성의 말소.2)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처음에는 이유 없는 관심, 이유 없는 호의, 이유 없는 사랑 같은 게 있었다고 믿었다. 누군가에게 특별히 쓸모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는 서로를 바라봐주며 살 것이라고 믿었다. 믿음은 진리가 아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쓸모 있는 존재가 아니라면 상대는 나와의 관계를 끊어버린다. 이런 사회 속에서 굳이 사람을 만날 이유도, 그렇게 노력할 이유도 없다.
그 우산을 본지 1주일이 지났다. 여전히 우산은 그 자리에 있었다. 버려지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비가 내렸다. 우산을 들고 다니는 것이 귀찮아 잘 안 들고 다니지만, 집에 부모님이 계셨다. 부모님은 꽤 많은 비가 올 거라는 소식에 우산을 챙겨주셨다. 하늘에는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았다. 일기예보가 또 틀렸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빗방울이 한두 방울 내리기 시작하더니 나의 생각에 대한 반항이라도 한다는 듯이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참을 걸었다. 어린 여자아이 하나가 어느 건물 아래에서 움츠려 울고 있었다. 우산이 없는 듯했다. 분명 오늘 일기예보에서는 오래 비가 올 거라고 했는데 저 아이는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나 같은 건장한 청년이라면 몰라도 저 아이에게 이 정도 되는 비를 맞는다면 건강에 문제가 생길 것이다. 같이 쓰고 데려다 줄까라고 생각했는데, 휴대가 편한 작은 우산을 들고 와서 그것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비를 맞아도 괜찮으니 그냥 내가 쓰고 있는 우산을 주자고 생각하며 아이에게 다가갔다.
"저…저기… "
이상하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저게 다였다. 다음 말을 빨리 이어서 해야 하는데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우산도 쓰지 않으면 녹이 슬어서 다시 펴지 못한다. 인간의 마음도, 입술도 그런가 보다. 난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초라하게. 비참하게.
그렇게 내 마음은 녹슬어 펴지지 않았다.
그렇게 내 입술은 굳어 펴지지 않았다.
다시는 펴지지 못할 마음과 입술을 끌어안은 채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버려진 우산이 보였다.
1분 동안 멍하니 우산만 쳐다봤다. 그러더니 이상하게도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왜 눈물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눈물이 날 뿐이었다. 많이. 아주 많이. 한참을 우산을 바라보며 흐느껴 울었다. 그 속에도 여전히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슬플 뿐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흘려본 눈물이었다. 1달? 3달? 아니 1년 동안은 내 마음속에서 눈물이 얼었던 것 같다.
눈물은 그쳤지만 비는 그칠 생각이 없었다. 나는 버려진 우산을 펴봤다. 너무나도 녹이 많이 슬어 펴지지 않았다. 왜 간절했는지 모르겠다. 제발 한 번만 몸을 펼쳐달라고, 한 번만 더 펼쳐달라고 애원하는 마음을 가졌다. 어느새 쓰고 있는 우산까지 팽개치고 비를 맞으면서 그 우산을 펴기 위해 용을 썼다. 한참의 사투 끝에 우산은 펴졌다.
한 손에는 팽개쳐버린 우산을 주운 채, 한 손에는 다시는 펴지지 않을 것 같았던 우산을 쓴 채, 그 아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저기… 우산이 두 개라서 그런데, 혹시 이거 쓰지 않을래?"
아이는 받아도 되는지 어리둥절해하면 불안해했다.
"우산이 두 개라서 내가 들고 가기가 힘들어서 그래, 혹시 이 우산을 들고 가줄 수 있을까?"
아이는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는 자신의 집이 있는 방향처럼 보이는 곳을 향해 나아갔다.
또다시 눈물이 흘렀다. 여전히 이유는 모르겠다. 분명 비를 맞아서 추워야 할 텐데 이상하게 따뜻했다. 춥지 않았다. 겨우 펴진 우산을 쓰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우산살이 완전히 망가졌다. 아마 이 우산이 버려진 곳부터 아이가 있었던 곳까지 오는 것이 이 우산의 한계였으리라. 어쩌면 펴지는 것조차 기적이었는지 모르겠다. 결국 망가진 우산을 손에 쥔 채 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몸은 점점 축축해졌는데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렇다 내 마음은 녹슬었지만 펴지길 원했다.
그렇게 내 입술은 굳었지만 펴지길 원했다.
그 우산이 그렇게 펴지길 원했던 것처럼.
기적은 있나 보다.
펴지지 않을 것 같았던 우산이 펴지는 것이,
펴지지 않을 것 같았던 마음이 펴지는 것이.
펴지지 않을 것 같았던 입술이 펴지는 것이.
1) 보에티우스, 『철학의 위안』
2) 기 드 모파상, 『비곗덩어리』